양산 김대근 법사편 8
남원교당 이전
시내에 2개 교당 설립 계기
보상금으로 남원교당 신설

사진>남원교구장재식시 법호수여식 후. 앞줄 우측에서 두 번째가 필자.
 이상칠 남원군수와의 면담이후 나는 남원교당 이전문제로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했다.
 공원용지로 고시되어 있기에 땅을 매도할 수 없다는 이 군수의 답변은 한편으로 현실을 직시할 수 있게 했다.
 공원 측에서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언제라도 교당을 내줘야하는 현실이 가슴아프고 억울하기까지 했지만 매매계약서가 아닌 임대계약서만을 갖고 있는 우리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황망한 마음으로 대산종법사님께 찾아가서 자세한 상황을 보고 드렸다.
 대산종법사님은 매우 놀라시면서 앞으로 남원교당이 그렇게 된다면 구명운동이라도 해야겠다. 다른 방법은 없겠느냐고 하시면서 걱정해 주셨다.
 그날부터 종법사님께서는 조실을 방문한 대중들에게 남원교당의 어려운 상황을 설명해 주시면서 심고를 올려 주셨다.
 남원교당으로 돌아온 나는 요인들을 중심으로 대책회의를 수없이 했지만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오랜 고민과 갈등 끝에 남원교당을 포기하고 시내로 교당을 옮길 것을 결정했다. 당시 남원교당 고경원 교도부회장이 실질적인 소유권을 갖고 있는 약업사 건물을 3천5백만 원에 매입, 교당을 그곳으로 이전하기로 하고 대산종법사님께 매입하게 된 경위를 보고 드렸다.
 종법사님께서는 각기관에 협조를 부탁, 1천7백여만원이 모금되어 남원교당 이전에 큰 힘이 됐다.
 나는 교당 이전을 위해 시내의 한 예식장을 활용하여 6개월 동안 특별기도식을 가졌다. 기도가 끝난 후 약업사 자리로 옮겼다.
 이전 봉불식을 가진 후 얼마 후에 남원교육청이 이전을 하게 됐는데 남원교육청의 위치가 교당하기에는 너무도 좋은 입지여건을 갖추고 있었다. 525평의 넓은 대지에 교통과 상권의 중심인 남원교육청 자리는 약업사 자리였던 남원교당의 자리와 비교해 볼 때 누구나 탐내던 위치였던 것이다.
 요인 회를 개최했다. 요인들도 그 자리가 교당위치로는 적격임을 알고 있었으나 문제는 재정의 확보였다.
 남원교당이 금암봉터에서 이전할 때 교단의 의료기관등 여러 사업체에서 많은 협조를 받았던 터라 이번에는 대지 구입에 따른 협조를 부탁할 처지가 못돼 무척 난감했다.
 그때 김혜중 교도가 전주 역 앞에 개인소유의 건물이 하나 있는데 혜중유아원으로 명칭을 붙여준다면 희사하겠다는 천만뜻밖의 제의를 해왔다.
 숱한 우여곡절 끝에 예산 이철행법사의 도움으로 얼마간의 재정을 확보한 나는 교육청 매도를 위한 공개입찰에 참여했다.
 당시 남원의 재력가들 대부분이 공개입찰에 참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우리는 행여 다른 사람에게 입찰이 결정될까 염려되어 5백여만원이 더 많은 1억6천5백만 원을 적어 제출, 남원중앙교당으로 낙찰되게 했다. 이렇게 해서 뜻하지 않은 또 하나의 교당이 남원시내에 자리하게 되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오늘날 남원이 시로 승격되어 발전에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현실에서 남원시의 중앙에 위치한 남원중앙교당은 재정만 확보되면 525평의 대지 위에 보란 듯이 교구청을 신축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남원교당(금암동) 시설에 따른 보상비로 4천5백만 원을 남원 군으로 받았다. 4천5백만 원의 보상비로 대지를 매입하고 교당을 신축, 남원교당으로 봉불식을 갖기에 이르렀으니 금암동에 있었던 남원교당의 일은 유감스러운 면이 없지 않지만 한편으로는 2개의 교당이 마련되는 계기가 된 듯하여 다행스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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