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석자
김성훈교무(원광대교수 대표집필)
이정주교무(상주선원부원장)
이정택교무(학림사 사감)
일원상 진리를 온몸으로 체험, 실증하고
인도정의의 참 삶 열어줄 사명 자각해야

 대각개교절 봉축의 뜻
 급변하는 역사 상황 속에서 또 다시 대각개교절을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들이 해마다 대각개절을 봉축하는 뜻은 첫째, 소태산 대종사님께서 이 시대의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간절한 구도의 고행 끝에 일원의 큰 도를 깨치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경축한다는 것이요, 둘째, 큰 깨달음의 소식을 통하여 답답하고 어둡던 마음을 밝히자는 것이요, 셋째, 풍요롭고 편리한 물질문명의 한계 상황 속에서 온갖 사회병리와 인간 소외 현상으로 시달리고 있는, 불행한 인류의 영혼들에게 영원한 희망과 빛을 던져주자는 것이다.
 큰 깨달음의 역사적 사실을 해마다 되새겨봄으로써, 소태산 대종사님을 우리의 진실한 마음의 스승으로 영접함과 동시에, 우리는 더 이상 중생이 아니고 법신불 일원상과 나와 소태산대종사가 둘일 수 없다는 신앙 체험의 의례도 승화되는 것이다. 이 큰 소식이 우리의 마음에도 큰 소식으로 전해질 때, 비로소 깨달음의 빛으로 일원상 진리의 빛은 그림자 없는 빛으로 시방세계와 일체 생령을 다 비치기 때문에, 지칠 대로 지친 인간의 어두운 마음의 그림자들이 흔적 없게 되는 것이다.

 개교정신
 개교의 정신은 <정전> 개교의 동기에서 그 정신을 밝혀주고 있으며,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로 함축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오늘날 과학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인간이 물질의 노예가 되었다는 현실 진단에서 볼 때, 새로운 세계의 도래와 새로운 정신적 종교의 필요성을 주장하였다.
 둘째, 물질을 사용하여야 할 사람이 도리어 물질의 노예가 된 고통스런 상황을 바르게 회복하려면, 정신적 가치와 물질적 가치가 정상적으로 회복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어떠한 한계 상황에서도 절대적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정신적 인격이 우선적인 가치 판단의 기준이 되어야지 물량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보다 우월하게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셋째, 진리적 종교의 신앙 정신이다. 진리적 종교란 일원상 진리의 상징적 종교를 뜻한다. 원불교뿐만 아니라 모든 종교의 궁극적 깨달음의 대상이요 믿음이 대상을 말한다. 다른 말로 말하면 궁극적 진리요 실재로서 도이며, 불성이며, 우리의 본 마음이며, 일원상 진리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의 근원적 진리를 진리적 종교라고 볼 수 있다.
 넷째, 사실적 도덕의 훈련 정신이다. 이사병행, 영육 쌍전, 무시선, 사사불공 등은 사실적 도덕의 정신을 잘 반영해 주고 있다. 그것은 인도정의의 공정한 도덕이며, 현실적 삶의 도덕이며, 시대적이고 대중적인 도덕을 말한다.
 다섯째, 광대 무량한 낙원세계 건설의 정신이다. 광대 무량한 낙원은 모든 인류의 영원한 이상의 세계로, 영적인 깨달음의 초월된 정신 낙원이기도 하며, 하늘같은 마음으로 하늘 살림하는 불보살들의 현실 낙원이기도 하며, 일원의 진리가 현실적으로 구현된 이상적 도덕사회를 뜻하기도 한다. 이 낙원은 오로지 영적인 깨달음의 체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정신의 세계이며 도의 세계인 것은 분명한 사실로 믿어진다.
 
창립정신
 개교의 정신을 구현할 목적으로 볼 때 교단 창립이라고 하는 현실적 방법이 큰 과제가 된다. 정신 개벽의 주체적인 실체가 없으면 큰 깨달음의 소식도 단지 깨달음의 빛일 뿐이지 큰 소식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일원상의 진리를 증득하고 이어받아 계승할 교화 집단으로서 교단 창립은 불가피한 역사적 소명이라고 할 수 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고 평지에 태산을 쌓듯, 빈손으로 엄청난 역사를 새롭게 개척하고자 할 때 부딪치는 현실적 한계는 부처님의 능력으로도 짐작된다.
 그러한 극한적 상황을 극복할 극한적 정신무장이 요청되었을 것이고, 창립 초기의 그 정신무장은 창립정신으로 원불교 적 승화가 거듭되면서 지금까지 그리고 영원히 계승될 것이다. 그러므로 창립정신은 창립한 정신과, 창립할 때의 정신가, 계승해야 할 창립정신으로 구별할 수 있다. 창립한 정신은 개교의 동기에서 찾을 수 있고, 창립할 때의 정신은 일반적으로 창립 정신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계승하여야 할 창립 정신은 시대적 상황과 교학적 관점에 따라서 창조적 해석과 의미부여를 할 수 있는 융통성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알려진 창립정신에 대한 일반적 견해는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견해는 절대 복종의 대 신봉정신 일심합력의 대 단결정신 사무여한의 대 봉공정신 이소성대의 대 근실정신이며, 둘째 견해는 이소성대사무여한일심합력무아봉공의 정신인데 무아봉공은 사무여한과 일심합력의 정신과 중복된다고 생각하여 생략하는 경향이다. 셋째 견해는 위의 두 견해가 구체적인 지향적 목적이 결여되었다고 보고, 자립정신, 개척정신, 봉공정신으로 구체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넷째 견해는 조단정신, 방언정신, 혈인 정신이다. 조단 정신은 공의와 공동체 의식 체험이며, 방언정신은 근검, 헌신, 개척정신의 체험이며, 혈인 정신은 신앙, 희생, 혈성정신의 체험이라고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여러 의견이 있었으나 큰 관심을 끌지 못하였다. 극히 최근에 신이라는 말이 새겨져 있어서, 개념상 혼란을 가져 올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으나 어느 교도들의 모임에서 다른 시각으로 창작해 본 용어라는 것이 밝혀졌을 뿐이다.
 
 원불교 왜 나왔나?
 그러면 이와 같이 원불교가 어렵게 세상에 출현해야만 했던 참된 뜻은 무엇인가? 소태산께서 깨달아 보시니 이미 옛 성현들이 깨달은 바와 같은 소식이다. 하시면서 왜 스스로 새로운 종교와 제도를 만들어 딴판을 벌여 놓았을까? 이제우리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숙고해야 할 시점에 서 있다. 이 문제 해결 없이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진실한 제자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일원의 큰 소식을 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세계의 많은 종교를 그리고 한국의 여러 종교들의 현상 가운데 원불교가 하나 더 끼어보고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전무후무한 완전한 종교를 만들기 위하여 이렇게 힘든다고 하였다. 완전한 종교로서 원불교의 역사적 모습은 무엇이며, 다른 종교들보다 확실하게 새로운 원불교 적 종교 현상은 무엇인가를 현재의 상황 속에서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디 쉬운 일이냐고 반문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절벽 같은 모순을 범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겨우 소태산 탄생 1백주년인데도 새로운 종교의 참 모습을 자랑스럽게 드러낼 용기와 자신감이 없다면 대단히 부끄러운 일이다.
 만일 완전한 새 종교의 모습을 보여 줄 수 있고, 그것을 모두에게 실증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소태산 대종사님을 만나는 길이고, 일원상의 빛을 보는 일종의 신비, 체험이며, 광대 무량한 낙원의 황홀한 경지인 것이다.
 우리는 목마르다. 그러한 일원세계와 깨달음의 빛을 보기 위하여 영생을 기다리다가 여기까지 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우리 모든 공부인들의 영생 길과 큰 깨달음의 소식을 열어 주어야 할 사명을 새종교 원불교가 스스로 맡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것만이 원불교가 출현한 확실한 이유이다. 소태산께서는 약속하셨다. 나의 가르침대로만 하면 누구나 쉽게 부처 될 수 있다고 확실한 믿음을 주셨다.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님의 제자로서 만족할 수 없다. 일원상의 빛을 통하여 우리가 일원불이 되고 부처가 되기로 서원하고 서원 할 뿐이다.

 일원상을 숭배할 것인가? 일원상 인격을 나툴 것인가?
 과거의 신앙은 불상 숭배를 위주로 하였다. 불상만 숭배하고 있으면 부처 되기는 어렵다. 부처님 가르침대로 길을 묻고 배우고 또 자비의 위력에 힘입어 부처님 같이 살아야 언제인가 빛을 보고 부처가 될 수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도 자기를 숭배하라고 한 적은 없다. 숭배는 하나의 예불에 불과하다.
 일원상 숭배도 마찬가지다. 일원상은 마음 부처라 하였다. 마음의 일원을 찾지 못하고 밖으로 일원상을 숭배만 한다면 착실한 교도는 될 수 있어도 일원상 진리의 빛을 체험할 수는 없다. 내가 일원 불이 되기 이해서는 일원상 진리의 가르침대로 실천하고 기원하고 위력을 얻어 일원상 같이 인격을 나투는 일이다. 이것이 큰 깨달음의 소식을 듣는 길이며, 소태산 대종사님을 마음의 스승으로 모시는 길이다. 비로소 여기에서 개교의 정신도 창립정신도 참으로 계승되는 것이다.
 이 소식도 모르고 완전한 새 종교라고 외쳐대 보았자 역시 영혼은 피곤하고 목만 아프고 시끄러운 공해만 던져 줄뿐이다.
 요즈음 우리 교단 현실을 볼 때 기성 종교의 현상과 별로 다를 바 없다고 생각될 때 얼마나 안타까운 심정인지 모르겠다. 정신을 개벽하고, 정신적 인격을 창조한다는 교화 집단에서, 어쩌다 이렇게 물량적 가치 평가가 지배하는 분위기가 되었는지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이러한 점에서 교도 성적사정 방법도 면밀한 교학적 검토가 충분히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공부 성적은 영생의 서원과 관계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백번 신중히 하더라도 완전할 수는 없다. 모든 것을 현실 제도만으로 해결하려는 방식 자체가 큰 실수가 아닐까 염려된다. 전무출신 제도 개선 문제도 그 발상 자체부터가 좀 옹색하고 답답한 것 같다. 일원주의 정신대로 시원시원하게 툭툭 터 버렸으면 좋겠다. 같은 교무끼리 무슨 호칭도 그렇게 많으며, 왜 이렇게 구별하고 차별하는데 정력을 소비하면서, 하나로 화합 단결하고 격려하고 사기를 앙양시켜서 잠재 역량을 계발시키는데는 소홀한지 모르겠다. 집단 이기주의적 모습으로 비춰질 때는 실망감마저 느낄 때가 있다.
 우리의 진실은 일원상 진리를 팔아서 잘 사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 아니다. 일원상 진리를 온몸으로 체험하고 실증하여 그대로 빛이 되자는 것이다.

마음공부의 실천적 체험 종교
 첨단 과학의 위력을 자랑하는 현대의 위기는 3인칭 지식과 기능적 사고 방식에서 온 인간 소외의 병리현상을 스스로 책임지겠다고 나선 집단들이 바로 종교 병리 현상을 낳았으니, 그 병맥은 2인칭 설교 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누구의 말씀대로 가르침대로만 하면 지상낙원과 극락이 온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은 모두 2인칭 설교 문화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누구누구의 말씀대로 가르침대로만 하면 지상낙원과 극락이 온다고 떠들어대는 그들은 모두 2인칭 당신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만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는 사람뿐이니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은 보기 힘들다. 그 공덕을 보여주는 부처님은 찾을 길이 없다.
 이제현대 문명의 한계를 극복하기 이해서는 마음 공부의 실천적 수행 문화가 일상적이고 보편화되는 길뿐이다. 소태산의 소식인 마음 공부는 인도정의의 실현을 통하여 실증되어야 하고, 마음 공부를 통하여 교단의 권모술수가 현실적으로 극복될 때 대각 개교 경축의 참뜻이 있는 것이다.
 마음공부의 실천적 체험의 공덕이 발양 될 때 완전한 새 종교 원불교의 참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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