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회상 숨은 조약돌로 사람답게 살도록 키워주신 큰사랑
김대근 교무 어머니 안경신 선생편 2
강물에 떨어진 둥근 해 품안에 안아
네가 장차 가야할 곳은 불법연구회다
태몽

대부분의 많은 사람들은 아이를 갖게 될 때 태몽을 경험한다고 한다. 나의 어머니께서도 우리 형제들 태기가 있을 때마다 태몽이 있었다고 한다.
 큰 형님인 대산종법사님을 가지셨을 때는 마을 앞에 있는 아미산이 거꾸로 보였고 앞으로 흐르는 시냇물이 돌연히 큰 바다를 이루었다고 한다. 그리고 중천에 떠 있는 둥근 해가 강물에 떨어져 집안에 광명이 가득하므로 나의 어머니는 그 순간 찬란한 빛을 흠뻑 마시고 그 해를 품안에 안고 싶어서 치마로 세 번이나 안으셨다고 한다.
 둘째 형님을 가지셨을 때에는 집안에 닭들이 가득 차 있는 꿈을 꾸셨다고 하고 내 태몽으로는 계곡이 있는 산길을 올라가는데 스님 세 명이 있어서 어머니가 그 중 한 스님에게 다가가 나와 인연 맺자라고 했더니 웃으며 그러자고 했다 하셨다. 막내인 소산 대훈교무를 가지셨을 때는 신선들이 봉황 산에서 내려오는 꿈을 구셨다고 하셨다.
 어머니는 평소에도 조촐한 생활을 하셨지만 특히 임신 중에는 부정한 장소에는 가지 않으셨고 냉수를 마시면 해롭다하여 삼복더위에도 꼭 더운물을 잡수셨다.
 이처럼 정성스런 태교로 인해 우리 형제들은 다른 세상에 흐르지 않고 도문에 들어와 수도생활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어머니의 지극한 기원에서부터 우리 형제들의 종교생활에 대한 기초가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조부모님들의 일상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던 것이다.
 유난히 불법을 존중했던 우리집안의 이러한 가풍은 대대로 이어져 내려왔다. 증조부님은 불교의 서적을 가보로 삼으시고 불경을 대량으로 구입하셨다. 증조모님께서는 별당을 정결하게 치우고 수십년 동안 경을 독송하시며 많은 불사를 하셨고 조모님께서도 오로지 부처님 만나 뵙기를 염원하시면서 경을 외우셨다.
 나의 어머니 또한 이런 집안 분위기에서 열심히 어른들 뜻을 따라 불법을 존중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차에 삼타원 최도화님이 어느 날부터인가 우리 집에 왕래하시게 되었다. 그리고 대종사님을 만덕산에 오실 수 있도록 역할을 하셨고 교단 최초의 선방을 개설하였다. 이로부터 우리집안 교화에 남다른 정성을 쏟으셨고 일원대도 회상에 귀의하도록 까지 적극적으로 활동하셨다.
 이렇게 해서 우리 형제들은 일찍이 입교하여 법명을 받는 등 수도문중의 일원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국민학교를 졸업하게 되자 어머니는 나에게 총부로 갈 것을 말씀하셨다.
 네가 장차 가야할 곳은 불법연구회다. 생불님(대종사님)이 계시는 익산총부로 가야 한다.
 우리집안은 일찍 개화하여 당숙은 중국에서, 종형님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등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그 신학문을 공부하는 것보다는 생불님에게로 가는 것이 자식의 앞날을 열어주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래서 내 나이 열네살 되던 해 삼타원님의 안내로 둘째 형님과 4촌형님 나 이렇게 넷이서 익산총부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 당시 교통의 불편함은 이루 말 할 수 없었다. 좌포에서 총부 까지는 백사십리길, 우리 일행 넷은 걸어서 당일 총부에 도착했다. 꼭두새벽에 나서서 밤중에 당도한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린 나이에 나는 2년 동안 총부학원 생활을 하였다. 처음 뵈 온 대종사님께서는 어린 몸으로 걸어오느라 애썼다고 하시며 어떻게 왔느냐고도 물으셨다. 나는 어머니가 가라고 해서 왔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어머니의 자식 사랑은 이 우주를 감싸고도 남는 것 같았다. 신학문을 공부해서 사회적으로 출세시키는 것보다는 진리를 연마하여 세세생생 사람답게 살아가도록 인도하신 그 큰 뜻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나이가 들고 교단에서 전무출신으로 봉직하면서 경계를 당할 때마다 수행적공의 기쁨을 느낄 때마다 더욱 어머니의 은혜가 뼈저리게 와 닿는다.
 나는 처음 총부에 와서 학원생활을 2년 동안하고 계속 교역자로서 남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고향 좌포에는 아버지가 집 한 채를 지어 희사, 교당이 설립되었고 초대교무로 송봉환교무가 부임했으며 둘째 형님이 초대교도회장직을 맡았다. 따라서 어머니는 알뜰한 주무 역할을 다하시며 교당 일을 최우선으로 하셨고 어떠한 일에도 불만이 없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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