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정윤
제2편 대종경 성리품
현실을 떠난 수행은 생명이 없고
육근동작, 일상생활 그대로가 도

[15] 대종사 봉래정사에 계시더니 선승 한 사람이 금강산으로부터 와서 뵈옵는지라, 물으시기를 그대가 수고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멀리 찾아왔으니 무슨 구하는 바가 있는가. 선승이 사뢰기를 도를 듣고자 하나이다. 도의 있는 데를 일러주옵소서.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도가 그대의 묻는 데에 있나니라. 선승이 예배하고 물러가니라.
 도가 어디에 있는가?매우 흔한 화두이다. 도, 불법의 진리, 부처님은 같은 뜻으로 쓰인다. 불법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던져보는 물음이다.
 우주의 운행, 삼라만상의 생생약동하는 모습이 모두 도이다. 도가 무엇인가? 할 때는 진리의 체 자리를 중심으로 한 물음이고, 도가 어디에 있는가? 할 때는 진리의 용자리를 중심으로 한 물음이다.
 도가 어떻게 현실적으로 나타나는가? 우선 나의 마음작용이 모두 도이다. 볼 때에는 도가 눈에 있고, 들을 때에는 귀에 있고, 말할 때에는 입에 있고, 붙잡을 때에는 손에 있고, 걸어갈 때에는 다리에 있고, 생각할 때에는 마음에 있다. 천만경계 속에서 육근 동작을 할 때, 동작 하나 하나에 도는 있는 것이다.
 우주가 성주괴공으로, 일년이 춘하추동으로, 하루가 밤낮으로, 인생이 생로병사로 바뀌는 것 그 모두가 도인 것이다.
 인간의 일상생활 속에 도가 들어있다. 밥 먹고 잠자고, 일하고 놀고, 가고 오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울고 웃고 하는 그 모든 생활이 그대로 도인 것이다. 인간의 육근동작 모두가 도인 것이다. 진리는 인간의 육근 동작을 통해서 나타난다 .아무리 큰 선사라 할지라도 진리는 육근동작을 통해서만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도는 멀리서 구할 것이 없다. 각하조고란 말이 있다. 진리를 멀리서 구하지 말고 가장 가까운 바로 그 자리에서 진리를 깨치도록 노력하라는 뜻이다. 시간 중에는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중요하고, 일 중에는 지금 하고 있는 그 일이 가장 큰 일이며, 사람은 지금 만나고 있는 그 사람이 가장 중요한 사람인 것이다.
 그리스의 철학자요 천문학자인 탈레스에 관한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탈레스는 밤마다 마당으로 나와 하늘의 별을 관찰하였다. 하루는 별을 쳐다보다 발 밑에 우물이 있는 줄을 모르고 빠져버렸다. 마침 이 광경을 본 하녀가 깔깔 웃으며 선생님은 하늘의 벼보다 먼저 발 밑의 우물을 보아야 되겠어요했다.
 바로 이것이다. 도는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것이다. 우리의 현실생활 속에 있는 것이다. 십자가두에 고봉정상이요, 고봉정상에 십자가두라는 말이 있다. 십자가두는 현실세계요, 고봉정상은 수행의 세계이다. 현실세계를 떠난 수행은 생명이 없다. 수행을 하면서도 현실을 외면하지 않고, 현실 속에서도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무시선 무처선,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도를 떠나지 않고 살면서도 도를 모르고 산다. 마치 물고기가 물속에 살면서도 물을 모르고 사는 것과 같다.
 도가 무엇인가?도가 어디에 있는가?하는 그 물음 속에 이미 도가 들어 있는 것이다. 아무리 도를 떠나지 않고 살아도 이러한 물음이 없으면 도가 어디 있는지를 모른다. 도는 내 자신과 항상 하나인 것이다. 다만 하나인 줄을 모를 뿐이다. 그러나 도를 깨치고 보면 나와 두가 둘이 아닌 하나인 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도는 스스로 깨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갖다주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은 나에게 도를 가져다주는 사람이 아니라, 도를 깨치게 인도해 주는 사람일뿐이다. 그래서 도를 깨치고 보면 지금까지 자기 자신이 소를 타고 소를 차장 다닌 것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도와 함께 살면서 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은 마치 소를 타고 소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도가 어디에 있는가 하는 물음이 간절해야 도를 깨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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