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믿으면 무엇이든 잘 할 수 있어요

박은섭 교구장님과 마원종ㆍ김덕영 교무님이 계시던 원기72년은 교당부지 335평을 마련하는 등 뜻깊은 한해였다. 그때 이미 대정.성산교당과 원광요양원이 지어졌고 다른 교당들도 새롭게 단장됐다. 교단적으로 성업봉찬사업이 한창 진행중이어서 우리도 퍽 고무되었다. 문화교화 뿐만 아니라 지역교화의 중심이 될 전법도량이 필요했다. 33평짜리 단층슬라브집 교당에서 한마음 한뜻으로 기도해오는 교도들은 교당짓는 일을 신앙적 과제로 삼고 어디 한번 해보자고 결단을 내었다.

「작은데로부터 커진 것 외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교무님들은 국제훈련원 건립을 서원한 천일기도를 회향한 후 겪기 힘든 오랜 정진기간이었음에도 다시 「만인동참 천일기도」를 시작하셨다. 나는 그저 마음 속에서 「교구청 지을려면 한 10년 걸릴거다」하고 찬란하고 행복한 꿈만 꾸었다. 모두들 애초부터 황당하고 무력하고 어설펐고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지나고보니 그때의 꿈과 소망이 교도들을 이끌었고 마침내 이루게 한 것이었다.

大山상사님께서 예전에 「하늘도 땅도 사람도 응해야 집(중앙훈련원)이 지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우리의 생각과 노력과 시간만으로는 어림도 없고 사은님의 능력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었다. 원기74년 임선양 교구장님이 부임하시어 당신 임기의 마지막 교화현장이라며 교구청 건립은 진리적 소명이라고 다그치셨다. 원기77년 10월4일에 그 천일기도를 회향하시고 다시 5백일 정진기도를 덧붙이셨는데, 3대 교구장이신 김보현 교무님이 마무리를 하시었다. 김보현 교구장님은 원불교 법종자를 제주도에 처음(원기49년) 뿌리시고 그 열매를 거두신 셈이 되었다. 10년쯤 잡았던 교구청 건립은 8년만에 이뤄졌다. 8억6천여만원이나 든 제주교구청은 상징성있는 정적한 건물로 기능성과 경제성을 살리며 영구보전에 힘썼다고 동생(김광석)이 설계의도를 밝혔다.

그간에 격려와 찬사의 박수가 있었는가 하면 훼방과 비난의 소리도 들려왔다. 그러나 완공후 제주교구청은 우리 모두의 것이었다. 법신불 사은님은 우리가 노력했던 순간마다를 더 기록하실 것이다. 봉불식(원기79년 2월22일)에서 공덕탑 노래를 부를 때 「엿장사이며」하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눈물이 펑펑 나왔다.

그해 5월 첫 예회에서 나는 「濟山」이라는 법호를 받았다. 우리 교구에서 법호를 받은 이가 몇분 안되었기에 큰 영광이었지만 그 도덕적 중량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허물투성이요 연약했고, 버려야 할 생각, 씻어야 할 마음, 뉘우쳐야 할 일이 많았다. 내가 법호까지 받을 위치인가, 몹시 쑥스럽고 부끄러웠다.

「제산」에는 제주도와 중생제도와 자신구제의 뜻이 겹치고 있었다. 나는 교구장님으로부터 뼈대있는 원불교인으로서 상봉하솔을 잘하고 이름 그대로 제도를 잘하라는 격려의 가르침을 받았다. 나는 봉공하는 생활자세를 더욱 다듬고, 삼보를 잘 받들고 교당내외의 교도와 잘 어우러져 친교를 나누는 교도이기를 다짐했다.

마음을 바꾸면 모든 것이 새롭게 보이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있다. 선진님이나 받으시는 거룩한 법호를 받게되었으니 삶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다듬지 못한 삶을 추스려 변화를 시켜야 할 것이었다. 나는 워낙 바빠 차분히 앉아 교무님 말씀을 경청할 겨를도 없었다. 내 자신을 생각해볼 여유없이 지내온 삶의 태도를 바꾸기로 한 것이다. 법호수여식은 내 자신의 신앙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재확인시켜 주었다.

정말이지 일원의 교법을 믿고, 교전을 읽고, 악행을 안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것이다. 행동으로 실천하고 말씀을 살리고 선을 행해야만 교도다운 도리라고 생각한다.

〈제주교당 교도, 제주교구 교의회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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