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운 사람들의 삶에 도움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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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내청소년훈련원에 머물며

가히 측량하기 어려운 사람이 있다.

인품의 깊이와 포용하는 정도, 그리고 삶의 빛깔을 특징짓기 어려운….

76세의 노구에도 불고하고 미래의 희망인 청소년 교육을 위해 정열을 남김없이 태우고 있는 향타원 박은국 종사의 경우가 그렇다.

언양에서 벚꽃 길로 유명한 작천정 길을 따라 밀양방향으로 가다가, 석남사 입구에서 좌측길로 들어 산골짝 굽이길을 따라 가노라면 불연깊은 영취산, 가지산과 이웃해 있는 간월산 골짜기가 시작됐음직한 곳. 울주군 상북면 이천리에 아름다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루며 한국전통가옥으로 지어진 부산교구 배내청소년훈련원이 있다.

그곳이 바로 향타원 종사가 퇴임후 오랫동안 염원해왔던 청소년 교화를 위해 남은 열정을 불사르고 있는 곳이다.

『아직 나한테 시킬 일이 있으셨던지 퇴임후에 부산교구 교령으로 사령을 해서 이곳 일을 하게 됐다』는 향타원 종사.

원기24년에 입교하여 원기26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해 60년 가까운 세월을 교단과 함께해온 그는 출가 당시 부모로부터 승인서를 받지 못해 대신 제출한 「이유서」에 다음과 같이 출가의 이유를 밝히고 있다.

「저는 원래 구식 가정에서 아무 철모르고 그날그날을 지내다가 17세 되는 해에 다행히 丁蓮國씨의 인도로 입회를 하고 이 공부를 하게 된바 차차 공부를 해갈수록 마음에 깊이깊이 느껴진 바 있사와 이 공부와 사업은 영생에 나의 의무로구나 하는 생각이 나서, 전무출신 하기를 부모전에 여쭈었더니 아직은 허가를 하지 안하였습니다. 그러나 저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더욱더욱 꿋꿋하여 마음을 달리 돌릴 수가 없게 되었사오니 부친의 허가만은 종후로 제출하기로 하옵고 우선 제 마음만을 고하오니 여러 선생님께서는 저의 충정을 살피시옵소서(하략).」

일제치하의 어려운 시기에 어린나이임에도 세상이 걱정스럽고 허무했다는, 그래서 영산에 와 삼세인과법문을 듣게되면서 회상을 찾은 일이 기쁘고 만족스러워 전무출신의 삶을 서원했다는 향타원 종사.

그후 교단의 명령에는 수화불피하고 절대복종하며, 애욕을 초월하여 공부의 요도와 인생의 요도를 실천궁행하여 성불제중하기로 한다는, 무량겁을 통하여 종사주님의 법륜을 따라 영원히 떠나지 않키로 서원한 바를 지키기 위해 평생을 일관해왔다.

그러나 그는 출가후 혼자만의 힘으로는 항상 부족함을 느껴 언제나 함께 하는 삶을 살았다. 그가 함께 해온 것은 다름아닌 진리와 스승과 법과 회상. 지금까지도 교단을 위하여 자신을 위하여 계속하고 있는 기도생활은 바로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삶의 방법이었다.

「무시선 무처선」공부길 잡으러 기도생활

후진들이 「기도가 잘 안된다」는 말을 하면 「아직 아쉬움을 몰라서 그런다」는 향타원 종사는 처음 교당에 부임하여 무시선 무처선의 공부길을 잡아야 한다는 생각에 간절히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후에는 다급한 마음으로 교단일을 하기엔 『법력도 없고, 지식도 능력도 없으니 언제나 부족하고 아쉬워 힘을 좀 합해주시라고 법신불 사은님께 조르느라고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향타원 종사는 교단에서 명하는 임지 어디에서나 교화의 보람을 거둘 수 있었다.

해방의 기쁨속에 유일학림 1기생으로 학업을 마친 후, 전주에서 순교무로 근무하다가 운봉교당에 부임하였으나 6.25를 만났고, 초량 교무.총부 교무부장 4년.신촌.청주를 거쳐 서울 원남교당.부산교구 그리고 현 임지인 배내청소년훈련원까지….

그동안 폐결핵으로 고비도 넘기고 서울에서는 눈이 잘 안떠지는 병이 생겨 십수년을 고생하다 배내훈련원으로 오게 된 이후 다시금 눈이 떠진다는 향타원 종사.

하지만 그는 임지에 있을때나 아파서 몸을 가눌 수 없을 때도 끊임없는 적공을 통해 개인의 힘이 아닌 사은과 함께하는 삶을 일관해 왔다.

청소년 인성교육에 원력 세워

현재 향타원 종사가 원력을 세우고 추진하는 일은 훈련원의 중심지에 청소년 인성관 곧 대법당을 건축하고 소년 대종사상(관천기의상)을 세우는 일. 그중 인성관 건축 허가가 지난달 26일에 났다.

부산교구장으로 재임시, 서울에서부터 하고 싶었던 청소년 교화사업이었지만 부지를 구하는 것 조차 어려워 못하던 일이 어느 교도의 희사에 의해 전적으로 추진되었다. 향타원 종사는 물이 있고, 남향이며 편안한 자리를 훈련원 터의 기본 조건이라고 생각하고 그 조건을 갖춘 곳을 찾아 영남일대를 다 찾아다닌 끝에 간월산 배내골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인적도 드문 그 산골짝에 들어가 훈련원이 세워질 수 있게 될것을 기도하기 시작했다.

그후 7년만인 원기81년에 봉불식을 하고 자연의 경관을 최대한 살려두면서도 조화를 이룰 수 있는 현대식 건물과 한국 전통적인 가옥을 곁들여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훈련관을 조성해왔다.

그리고 이제 남은 것은 훈련원의 중심체를 이룰 인성관을 건축하는 것. 그 건축을 이루기 위해 10년간 기도를 했다는 그는 『올바른 가치관이 서지 않아 전도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30명 단위로 선방을 운영할 예정』이라며 『이 일은 단순히 원불교 일이 아니라 나라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선 세계적으로 음식 쓰레기가 가장 많다는 우리의 식생활 문화를 비롯해 의복, 의식 등 전반적인 인성교육을 통해 이 나라의 인재를 양성해낼 계획』이라고 강조했다.  

정산종사를 추모하며

정산종사 탄생 백주년을 앞두고 추모의 말씀을 청하자 먼저 눈시울부터 적시는 향타원 종사.

『어머니요, 엄한 아버지요, 스승님이셨기에 잊을수도, 감출 수도 없는 정산종사님을 생각하면 뼈속깊이 사무치고 안타까워진다』며 잠시 말을 잇지 못한다.

영산학원 시절부터 알뜰히 보살피며 이끌어 주시던 스승님이 열반하시자 「저렇게 훌륭하신 스승님을 만났을 때 성불하지 못하고, 그 크신 어른을 여의었으니 얼마나 박복한 일인가하여 49일간 문밖출입을 끊고 기도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마지막 기도 후 다음 스승님께 마음을 연하면 그것이 곧 정산종사님과도 마음이 연해지는 것임을 깨달아 그 슬픈 마음을 정리할 수 있었다.

향타원 종사가 특히 여러번 받들어 기억하고 있는 정사종사의 법문은 『살생하지 말라, 마음공부 잘하여서 새 세상의 주인되자』이다.

또한 『흔적이 없으시고 뵈올수록 法氣를 전해주셨기에 학원시절에는 법무실만 쳐다봐도 그 법훈을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교단 맥맥히 이어져야 할 전무출신

그렇게 항상 스승님과 법과 진리와 회상을 여의지 않고 60년 가까운 삶을 일관해온 그는 요즘 『무엇보다 전무출신의 참된 주인정신과 공심이 아쉽다』고 한다. 물론 전무출신이면 누구나 주인정신도 있고 공심도 있지만 전체를 생각하지 않고 자기 중심으로 생각하는 부분 공심, 편협된 주인정신은 바로잡아져야 한다고 한다. 그는 지금도 가끔 자신에게 이렇게 묻는다.

『이해와 명리를 초월하고 회상과 법을 위해 진정 자신을 다 바칠 수 있느냐』고. 그리고『스승님께 섭섭함이 생기면 자신의 부족함에서 그런 마음이 생기는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향타원 종사가 교단의 대의와 신의를 위해 역경난경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영산학원 시절부터 스승님의 지도를 통해 길러진 것. 그 힘으로 어떤 일을 당해서도 감수불보하며 살아올 수 있었다.

교화가 침체되고 IMF 한파로 어려운 요즘같은 시대일수록 『거리로 나가 저소득층의 어려운 사람들의 삶터를 찾아가 그들이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헤아려 실질적인 도움을 준다면 교화는 회복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 향타원 종사는 이제 나이가 들어 직접 해보지 못함을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특수교화를 담당할 교화자를 양성하는 일이 교단 정책적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후진들에게는 『공부길 잘 잡아야 늙어서 한탄스럽지 않다』며 『우리 공부는 대승적 공부지만 처음에는 소승적으로 잡아 철두철미하게 대조를 하고 증득한 후에 대승의 공부를 하게 되면 스승님들께서 내주신 법문이 다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고 전한다.

지금도 휴지 한 장을 다 쓰지 않고 의례껏 반을 잘라 나눠쓰는게 생활화 되었다는 향타원 종사. 자신을 위해서는 어느 것 하나 남김이 없고, 오로지 교단을 일구는 일에 출가 60년 세월을 다 바쳐온 향타원 종사는 교단에서 전무출신의 삶을 기념해 드린 퇴임장까지도 국가경제와 교단의 숙원사업인 방송국 건립기금에 쓰라며 기자의 손에 쥐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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