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각의 경지에서 제법하신 대해탈 부처님
『건국론』은 모든 사상 총섭하고 원칙을 제시

〈사진〉정산종사(1900~1962)

(2) 무의식 세계

(가) 정산종사는 무의식 세계에 들어가는 공부를 끊임없이 정진하셨다.

15세되던 해 겨울부터 거북바위에 제물 등을 진설하고 「후일 위대한 사업을 이루어 이름이 백세에 전하게 해주옵소서」 기도하고, 방안에서도 「천문도」 「지도서」를 그려놓고 천지 기운이 응하기를 빌으셨다.

18세 때에는 가야산에 도인 여처사를 만나러 가시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증산계 수련인들과 기도하셨다. 이때에 앞으로 불법을 공부해 나아갈 일이 소연명석하게 떠올랐으며 수련인들로부터 「큰 공부를 하려면 전라도로 가야된다」는 권유를 받으시었다.

5월에 전라도로 가서 강증산의 여동생(선돌댁)을 성주 집으로 초청하여 온 가족과 함께 3개월간 기도를 하는데 천상으로부터 서기가 소거가옥에 뻗지르기도 하였고, 정산종사는 「개안(開眼) 즉 견성하였다」고 주위의 인증을 받으셨다.

(나) 11월경에는 모악산 대원사에 머무시며 주문을 외우고 심공을 쌓아가는데 어느 날 밤 앞산에서 무슨 빛이 뜨는 것을 보고 그것이 무슨 빛인가 의심이 났는데 생각해 보니 그것은 금빛이라는 것과 아울러 옛날 두보의 시가 연상되셨다 한다.

「不貪夜識金銀氣 遠害朝看蘪鹿遊」

욕심이 없으니 밤에 금과 은의 기운을 알 수 있고 해심을 멀리하니 아침에 고라니와 사슴이 가까이 노는 것을 보겠도다. 그리고 「육도와 사생」에 대한 말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는데 우연히 육도며 사생의 변화하는 이치가 환히 나타났다.

「공적」이란 정한 성품에 마음이 그 가운데 있는 것이요, 「영지」란 동한 마음에 성품이 그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이 공적영지 속에 모든 공부길이 다 들어 있는 것이다. 천지도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면 어두우나 고요하고 명랑하면 하늘에서 이슬이 내리듯, 사람도 막히고 요동하면 어둡지만 수양을 많이하여 기운이 가라앉으면 침이 맑고 달며 마음이 영령하고 밝은 것이다. 이러한 정산종사의 말씀은 이런때의 심경인가 싶기도 하다.

19세에 정읍 화해리 김해운댁에 오시어 방에서 주문을 외우고, 마을 동산 기도터에서 기도와 선에 정진하셨다. 그래서 여러가지 신통을 부리었으나 대종사의 정법을 만난 후로는 다 놓으셨다.

(다) 대종사를 뵈옵고 영산으로 오셨을 때에는 3·1운동 전해(1918년)라 일제의 감시를 피하고 신통도 잠재우기 위하여 대종사께서 미리 마련해 둔 토굴에서 8개월간 생활하셨으니 자연적으로 외경을 떠나 수행정진을 하신 것이다.

이때 경상도에서 아버님께서 오셨는데 이원화가 진지상을 들고 굴안으로 들어가니 정산종사께서 보신 듯이 『아버님 오셨지요』, 대답하지 않고 밖으로 나오니 대종사께서 『그 사람이 아버지 오신 줄 알고 있지?』 하셨다. 두 분의 아심이 거울 같으셨다.

방언공사 마치고 법인기도 올릴 때에 매 3·6일 기도를 거행하는데 대종사께서 성계명시독에 의하여 10일동안 지낸 바 마음을 조사하여 신성 진퇴와 실행여부를 대조하는데 청·홍·흑 3색으로 구분하되 신성이 제일가는 사람을 청점으로 표해 나가는데 정산종사는 전부 청점 뿐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백지혈인의 이적으로 법계인증을 받으셨다.

(라) 대종사의 명에 따라 8월에 부안 월명암에 가시니 학명이 몇가지 성리문답을 해보고 혜안이 밝다며 「明眼」이란 불명을 주었다.

정산종사는 봉래산 쌍선봉에 기도터를 정하고 대종사의 경륜이 원만히 실현되어 낙원세계가 이뤄지기를 기도하며 끊임없이 정진하여 대정력을 쌓아 나가셨다.

이 무렵 대종사로부터 주의를 받으신 바가 법어 권도편 33장에 있다.

『큰 지혜를 얻으려 하면 큰 정에 들어야 한다고 하나 내가 월명암에서 무심을 주장하는 정만 익히었더니 사물에 어둡다고 대종사께서 크게 주의를 내리시더라』 이후로는 마음 놓는 공부와 잡는 공부를 아울러 하셨다.

(마) 23세에 대종사 말씀에 의하여 만덕산에 계시며 깊은 정에 들기도 하시고, 대종사의 훈련법이 나온 후로는 그 법에 의하여 정을 닦으신 줄로 생각된다.

노년 환후 중에 계시면서도 새벽마다 좌선을 하셨다. 정전을 수정하시면서 교리도에 「무시선 무처선」과 대등하게 「정시선(定時禪) 정처선(定處禪)」을 넣으려 하시며 무시선 무처선을 잘하려면 정시선 정처선을 잘해야 된다고 하셨다. 이는 정시선 정처선과 무시선 무처선을 아울러 일관해 오신 경험에서 얻으신 결론이라 사료된다. 이러한 대정력을 얻어야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된다.

(바) 5·16 이후 혁명정부에서 대학 정비를 위한 사무감사를 실시하게 되어 원광대학도 감사를 받게 됐다.

그런데, 학장을 비롯하여 상당수의 교수와 직원들이 전무출신으로서 무보수로 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원들이 감복하고 갔다는 것이다. 그때 정산종사는 병환이 위중하시어 동산선원에 계실 때인데 문병차 온 분들이 대학 사무감사에 대한 이야기를 위안드리기 위해서 말씀드렸다.

이를 들으시고는 『참, 잘했다. 꼭 그래야지』 하시며 기뻐하셨다. 그런데 아무리 반가운 일이라도 한 두 차례 들으셔야지 위문하러 온 분들이 차례로 일곱번째 인가를 말씀드려도 그때마다 처음 들으신 듯 반기셨다.

이러한 일을 뵈옵고 있던 한 교무가 사뢰기를 『편찮으신데 똑같은 말씀을 어찌 그렇게 다 듣고 계십니까?』 이에 꾸짖어 말씀하시기를 『어찌 그다지 속이 없느냐? 그 좋은 이야기라고 힘써 말하는데 내가 들었다고 하면 무슨 기운이 나겠느냐?』

김영신이 여쭙기를 『법체 미녕중이심에도 항상 만면에 웃음을 띠시니 어떻게 그리되십니까』 『몸이 아팠지 마음도 아팠는가?』

대종사께서 잘 익은 복숭아는 쪼개면 살과 종자가 깨끗이 분해되는 것을 해탈에 비유하셨는데 정산종사의 이러한 경지는 주관과 객관이 완전히 분리된 해탈의 경지라고 생각된다.

(사) 이러한 대정과 대해탈의 경지에서 대각을 이룬 것이다.

볼록렌즈를 가지고 따뜻한 햇볕을 모아 초점을 이루면 거기에서 불이나듯 소소한 마음을 모아 한자리에 집중하면 빛이 나는데 이것이 자성의 혜광이요, 대각이다.

정산종사는 이러한 대각의 경지에서 「원각가」를 비롯하여 모든 법을 내어 놓으신 것이다.

(아) 대정과 대혜 속에서 적절한 중정의 도가 나온다. 정산종사의 법호 「솥정(鼎)」자에 큰 의미가 있다. 우주의 진리나 과거 종교 또는 철학의 원리가 정산종사의 솥을 통해 나와야 새 세상에 더욱 활성화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지난 10월에 서울에서 탄생 100주년 기념으로 「남북화해와 송정산의 건국론」에 대하여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국내 국외 학자들이 종교지도자가 8·15후 불과 2개월만에 발표한 내용에 모든 사상이 다 총섭되어 있고 지금까지도 생각 못한 원칙까지도 다 제시해 주셨으니 「과연 이 어른이 이 분야의 모든 책을 다 참고하셨는지」 한결같이 감탄과 의문에 잠기게 됐다.

8·15와 6·25를 전후한 대혼란 속에서 헤매던 사람들의 앞길을 제시해 삶의 길을 열어 주시면서도 교단을 사회의 좌우간에 피해없이 이끌어 나가셨다.

이와 같은 대소사를 중정으로 묘용을 나투신 것은 완전 무의식 세계 즉, 공적에서만이 가능하리라 본다.

〈교무, 전북교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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