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아산 정주영 선생을 비롯한 현대측과 관계당국자 그리고 한평생을 오직 우리 인간을 위하여 땀흘려 일하고 고기도 제공하고 죽어서는 가죽까지 남기더니 이번에는 오랫동안 막힌 기운을 뚫는데 큰 공을 세워, 문자 그대로 희생정신을 본보인 일천한마리의 우공(牛公)들에게 깊은 경의와 감사를 드린다.

이번 금강산 관광에 대해서는 우리 남녘땅 동포들 중에서도 일부 반대가 있었고 오랫동안 진통과 산고를 치루면서도 서로 관광세칙마저 합의가 못 이루어져 여러가지 제약이 예상되었지만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행을 결행하기로 작정하였다.

지난달 20일밤, 금강호 선상에서 열린 KBS주최 금강산노래자랑 대회에서 노래하고 있는 임중제 교도.

사연인즉 첫째, 한 핏줄인 단일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이념의 차이와 전쟁의 상흔이 너무 컸었고 오랜기간 서로 다른 체제속에서 살다보니 불신이 커져 어려움이 많이 뒤따를 것이라 예상되었으며, 둘째 혈육이 상봉하여 망향의 한을 먼저 달래야 할 분들이 심적 불안과 경제사정 등으로 지원자가 생각보다 적어서 사업추진 당사자들에게 어려움이 따를 것 같았고, 셋째로 자식들의 간곡한 권유도 있었거니와 부족한 남편을 만나서 남모르는 고생으로 건강마저 잃어가는 늙은 아내의 소원이었다. 또한 나의 오랜 「금강산 동경증」을 치료하기 위한것 등 복합적 요인도 작용한 것이다.

고대하던 11월18일 오전, 아시아나항공편으로 강릉에 도착, 셔틀버스로 동해시에 당도하여 문화예술회관에서 오후1시부터 약 두시간동안 여행에 필요한 소양교육을 받았다. 이어서 여객터미널에 도착, 소정의 승선수속을 마치고, 선실(5층 167호)을 배정받은 다음 사진이 첨부된 명찰을 가슴에 달고 배에 올라 여장을 풀고 응급시 대피하는 간단한 안내교육을 받은 후 선박내부의 구경에 나섰다. 배 안의 주요시설은 식당 카페 라운지 디스코텍 놀이방 전자오락실 도서실 골프연습실 농구장 수영장 헬스클럽 이·미용실 그밖에도 리셉션회의실 의무실 사진관 공연장 등이 있었다. 객실은 9등급으로 27종의 형태에 총405실이었으며, 요금은 1백3만7천원~3백17만9천원(금강산 관광 입장료로 미화$300 포함)이었다.

금강호의 무게는 총 28,078톤이고 선체의 길이는 205.5m, 폭은 25. 2m이었고, 시속 20노트에 최고 2천명까지 태울 수 있다. 영화 타이타닉에 나오는 배보다 약간 작은 호화유람선으로 움직이는 호텔이었다. 유로터널이 개통되기전 네덜란드에서 영국의 런던항으로 건너갈 때 타보았던 배보다 더 좋았다.

현대 금강호 타고 첫 금강산관광 나서

대종사 법문 상기하며 감회에 젖어

승무원 수는 ALFBERGLUND 선장(스웨덴)외 449명이었고 이들중 우리나라 선원은 불과 50명이라고 하였다. 승객수는 최고령자인 심재린 할아버지(97세, 평양출신, 현재 경기도에 거주)외 936명이었고 그중 고향이 북쪽인 분들이 많았으며 다음으로 약 200여명의 내외신 기자와 보도진, 그리고 종교인, 화가, 사진작가, 문인, 의료종사원과 공무원, 환경문제와 생태계문제에 관심이 깊은 학자 및 6세의 어린이(최연소자) 등 퍽 다양하였다.

1998년 11월 18일 오후 5시45분. 겨레의 한(恨)인 분단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나라의 통일을 평화적으로 성취하여 마침내 온 세계의 정신적인 부모국으로 격상될 역사적 작업의 시발점이 되기를 간절이 염원하는 국내외 7천만 동포와 지구촌의 마지막 분단국이기에 화약고로 변할까 우려하는 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동해항은 어제밤부터 전야제로 고조된 분위기가 수많은 부두 환송객의 함성으로 가히 열광적이었다. 「부우웅」 하는 뱃고동 소리가 힘차게 울려퍼지면서 때마침 터져나오는 백여발의 폭죽이 동해의 밤하늘을 붉게 물들이는 장관속에 육중한 선체가 서서히 항구를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추위와 바람도 잊은채 9층 전망대에 서서 두손을 높이들어 환호에 보답하고 선실로 돌아왔다. 평소에는 하루에 두끼(오후 불식)로 지냈으나 오늘은 점심을 걸렀기에 6층 식당에 들러서 뷔페식을 간단히 들고 자리에 돌아와 마음을 가라 앉히고 가져온 안내서적들을 뒤져보다가 『원불교전서』를 꺼내어 379쪽의 대종경 전망품 5, 6장을 다시 정독하였더니 새삼스레 감흥이 일어났다.

대종사님께서는 1931년 일제의 암울한 통치하에 우리 겨레가 희망을 잃어가고 있을 때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시어 「금강이 현세계(金剛現世界)하니 조선이 갱조선(朝鮮更朝鮮)이라」는 글귀를 대중에게 일러주시며 말씀하시기를 「금강산은 천하의 명산이라 멀지않은 장래에 세계의 공원으로 지정되어 각국이 서로 찬란하게 장식할 날이 있을 것이며, 그런 뒤에는 세계사람들이 서로 다투어 그 산의 주인을 찾을 것이니, 주인될 사람이 미리 준비해 놓은 것이 없으면 무엇으로 오는 손님을 대접하리오」라고 하시고, 「그대들은 우리의 현상을 비관하지 말고 세계가 금강산의 참주인을 찾을때에 우리 여기있다 할 자격을 갖추기에 공을 쌓으라. 〈하략〉」 하셨다. 법문을 읽고나니 가슴이 벅차 올라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으나 내일을 위해 심고를 드리고 잠자리에 들었다.

〈광주교당, 전남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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