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헌개정, 대체와 골간만 다뤄야”

약력‥1927년 영광 불갑 출생. 원기27년 10월21일 출가, 유일학림 1기졸업, 원기62년 수위단원 피선, 이리보화당 사장, 교정원장, 중앙봉공회장 등을 역임하고 원기78년 퇴임했다. 법위는 정식출가위이고, 원기73년 대봉도, 원기76년 종사법훈을 받았다.


유월이 오면 뵙고싶은 스승님

『추모의달 유월이 오면 가슴 속 깊이 자리한 스승님의 용모와 말씀이 새록새록 솟아납니다. 당시 어린 학원생들은 마땅한 놀이가 없어서 탱자로 구슬치기를 하며 놀았는데 이를 본 대종사님께서 「다들 자기 책임을 다하고 있는데, 소위 전무출신을 하겠다고 나온 녀석들이 공부는 안하고 놀이에만 정신을 빼앗겨서 쓰겠느냐」며 크게 꾸중을 하셨습니다』

그날 송대 뒤 솔밭에서 솔가리를 긁어 모으라는 일을 계기로 윤산종사는 「오늘날까지 무슨 일이 있더라도 교단에 빚지는 생활은 안해야겠다」는 신념을 갖고 살아왔다고.

출가후 중앙총부에서만 33년을 봉직하며 교정 이모저모를 계획하고 실천하여 교단의 법제, 행정체계를 확립하여 법치교단으로서 면모를 세워 놓는데 크게 기여했던 潤山 金允中 宗師(72).

교단의 영욕과 함께 동고동락 해온 빛나는 삶의 그 뒷편에는 무량방편으로 제도해 주신 대종사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우뚝 서서 버티며 살아 숨쉬고 있었다.

『너희들이 어떻게 만난 인연인줄 아느냐? 전세에 깊은 인연이 있어서 이 회상에서 만났으니, 서로 위해주고 서로 도와주고 형제처럼 챙겨주며 살라』는 대종사님의 말씀이 어린 가슴에 아로 새겨져 어느새 교단관으로 뿌리를 내렸고, 개인이나 교단의 공부와 사업의 기초가 됐다고 한다.

전무출신의 사명감과 공심을 일깨워 주시고, 「동지간에 위해 주라」는 대종사님의 교훈은 교단이 커지고 사람도 많아지면서 법과 원칙으로 통제해야만 하는 경계를 대할 때마다 더욱 챙겨지고 간절해졌던 말씀으로 기억됐다고.

1927년 전남 영광군 불갑면 건무리에서 출생한 윤산종사는 조부 鶴山 金致一정사를 비롯 조모님, 부모님이 모두 독실한 교도였다. 특히 그 당시 숙부인 進山 金瑞龍정사는 전무출신으로 봉직하고 있어 원불교의 복된 가정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16세되던 해 마음 속으로 늘 존경해온 숙부을 따라 총부에 와서 대종사님을 뵙고 출가했다. 그 해가 원기27년 10월21일. 대종사님께서는 『뭐하러 왔느냐』고 물으셨다. 『참사람 되는 공부를 하러 왔습니다』 『그래 한 번 열심히 해봐라』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그때부터 조실 청소도 하며 대종사님을 가까이 모시면서 가르침을 체받은 홍은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암울하고 어려운 시절에 오직 한 길, 이 공부 이 사업에 모든 것을 맡기고 성불제중의 사명감 하나로 주어진 일터를 지켜왔음은 대종사님의 호념이 지켜주셨기 때문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33년간 총부 지키며

원기29년 총부에서 근무하던 윤산종사는 해방을 맞아 교단에서 벌였던 전재동포구호사업에 참여하여 서울구호소에서 열심히 뛰었다. 원기31년(1946) 유일학림 1기생으로 입학한 그는 학창시절부터 四山 吳昌建대봉도를 모시고 두 달동안 봉래정사를 수축하는 일에도 동참하는등 남다른 공심의 소유자였다.

정산종사는 그의 법명을 「允中」으로 개명해 주시면서 『진실로 중에 맞게 하라. 중도라 하는 것은 과불급이 없는 것이다. 이는 미운 데에도 이쁜 것에도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니 공사나 심신작용에 있어서 과불급이나 사사로운 애정과 친소에 끌리지 말고 공변되게 취사하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그가 교단의 중책을 맡게 될 것을 미리 보시고 내리신 법문이 아니었을까?

원기62년 교단의 얼이자 최고결의기관인 수위단원에 피선됐으며, 교정원장, 역전보화당 사장겸 중앙봉공회장 등 교단의 요직을 두루 거친 윤산종사. 특히 한국사회가 격변기에 처했던 원기67년(1982)부터 6년간 교정 최고책임자인 교정원장으로 봉직하며 「총화하는 교단·법치하는 교단·실력쌓는 교단·세계로 뻗는 교단」의 방향을 제시했다. 그당시 大山종법사의 뜻을 받들어 UR(종교연합)운동과 2대말 성업봉찬사업에 혼신의 힘을 다했으며, 교단경제의 육성 및 국제교화, 총부의 종합개발, 자선기관 설립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금년 스승의 날을 맞아 大山상사님과 기념촬영.

『그동안 제1, 2대 성업봉찬사업이나 대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사업은 교단의 기반을 튼튼히 하는데 초점을 맞춰 진행했지요. 그러나 정산종사 탄생백주년 기념사업은 공부와 사업에만 국한할 것은 아니지요. 일원세계 건설이 곧 삼동윤리 실천과 하나로 통하므로 세계를 무대로 종교와 사상이 넘나드는 사업을 전개하는 방향으로 추진된다면 정산종사의 위업이 드러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리보화당 사장으로 재직당시 윤산 종사는 무불간섭으로 임원들과 함께 숙식하며 새벽 좌선과 기도부터 공부심을 놓지 않고 일하는 제생의세의 실천도량으로 만들어 나갔다.

『보화당은 대종사님께서 사회에 기여하고자 봉공의 기초를 세우기 위해 가장 먼저 이뤄낸 산업기관이지요. 이곳이 바로 영육쌍전과 제생의세의 산실이 되어야 한다는 열의로 약품과 현금의 체계적 관리는 물론 건물증축, 역전보화당 지점개설, 전무출신 한의사 양성 등에 정성을 쏟았지요』

원기73년 교단창립 제2대말 성업봉찬회 결산시에 大山종법사는 그의 이같은 공덕을 높이 기리면서 대봉도 법훈을, 원기76년 소태산 대종사 탄생백주년 성업봉찬 기념대회를 기해서 종사법훈을 서훈했다.

법치교단 확립에 밀알 되어

윤산종사는 6·25동란과 개인적인 병역문제까지 겹쳐 3년동안을 고향에서 지내다가 원기38년 동산선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그는 원기40년 총부 사서부장겸 감사부장을 시작으로 총부 법제위원·정화사 편수위원·총무부장·법무실 법감·수위단회 사무처장·교정원부원장겸 이리보화당 사장, 교정원장 등 30여년간을 총부에서 교정의 체제를 갖추는데 열성을 다했다. 특히 大山종법사의 뜻을 받들어 법계의 향화가 살아나도록 법위사정의 체계를 잡았던 일은 그 무엇보다도 큰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이단치교 정신, 법치교단 확립에 앞장서 온 일생

정산종사 탄백사업, 세계를 무대로 하는 사업으로 추진

개교반백년 기념사업 시기에 수위단회 사무처장을 맡게된 윤산종사는 교헌개정 작업을 주관하면서 교헌에 전문(前文)을 갖추는 등 틀을 완정시켰다. 그 당시 이단치교의 정신을 법제화하기 위해 자문기관이었던 수위단회를 교단의 최고 결의기관으로 격상시키는 등의 개정과정은 지루하고 말도 많았다고 회고한다.

『피차의 입장이 다르고 사람이 많은 만큼 의견도 많아 백가쟁명을 하고 있을때 법치교단 체제확립을 위해 한 톨의 밀알이 되고자 다짐했지요. 그때의 방향은 화합을 체로 하고 법을 용으로 하여 상하좌우의 일사불란한 통제의 질서를 잡아 나가고, 교단 대소사를 공의와 종명으로 처결해 가고자 했지요. 더 나아가 교단 운영의 원활을 기하기 위해 도덕과 교정을 쌍벽으로한 건전한 운영체계를 확립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었지요』

이번 교헌개정 방향은

교단 만년대계의 기본법인 교헌이 바뀌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대부분 대중들은 관심이 적어서 혹 改惡의 우려도 없지 않겠냐며 그동안 세차례나 교헌개정에 간여해 온 윤산종사에게 조심스레 여쭈었다.

『교헌이 개정될 때마다 문제로 부각되는 것은 권력구조를 어떻게 하느냐와 교단의 통치체제를 어떻게 해야 하느냐가 관건이었다』며 『교화단과 교단기구를 하나로 보는데서 문제가 발생한다. 그러므로 종법사의 주재하에 수위단회·교정원·감찰원 등으로 나눠 의결권과 집행권이 중첩되지 않도록 철저히 분립해야 한다. 교화단은 수위단회의 하위조직으로 양립시켜 집행기구와는 별도의 형태를 취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예를들면 교헌 조항에서는 「해외종법사를 둔다」보다는 「둘수도 있다」는 식으로 대체와 골간만을 다루고 그외는 하위법인 교규로 미루어야 한다. 만일 세세한 부분까지 포함시키면 시대상황이 변했을 때 또 다시 개헌의 소지를 만들어 주는 우를 범하기 때문이다. 윤산 종사는 『개헌과정은 해를 거듭한 연구와 충분한 여론을 거쳐야만 한다』는 말도 덧부쳤다.

진정한 자유 누리며

대종사님을 친견한 후 정산종사와 大山상사님 등 세 분을 스승으로 모시고 지도받으며 살아왔으니 무한한 은혜와 축복을 받은 윤산종사님. 3평 남짓한 원로원 2층 방 한 칸에 거주하시면서도 진정한 자유를 누리시고 내적 절제로 삶을 추스리고 있는 종사님 모습은 삶을 되돌아 비춰주는 거울 그 자체였다.

박주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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