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한나라 때 중국산 비단이 로마 제국에 수요가 커지면서 한때 로마 경제를 위태롭게 하였다. 로마인들이 금을 주고 중국 비단을 수입하느라 자국에 재정적으로 큰 타격을 주었기 때문이다. 내륙 아시아를 횡단하는 고대 동서 통상의 도로를 비단길, 곧 실크로드라 불린 것도 중국의 비단이 서방으로 수출됨의 흔적이다.

이처럼 비단은 부귀와 장식의 보물로 여겨진 까닭에 주변을 비단으로 꾸미거나, 말을 비단같이 꾸미는 소재로 자연스럽게 우리의 귓전에 전해져왔다. 조선조 송강 정철은 1560년 <성산별곡>에서 비단을 화려한 꾸밈의 실체로 파악하여 비단으로 하늘을 아름답게 꾸민다고 하였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구한말 소태산 대종사가 살았던 시절도 비단은 부귀와 장식의 상징물로 여겨졌다. 이에 소태산은 <정전> 특신급 8조에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였으니, 감언이설(甘言利說)이나 교언영색(巧言令色)으로 말을 꾸며 상대방을 유혹하려다 말의 진실성을 잃지 말라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우리의 삶에 있어 언어생활은 매우 중요하다. 일상의 말은 나의 인격이 드러나는 마음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이에 언어사용에 있어 진실을 잃고 허영과 가식에 사로잡히는 것은 나의 인격에 손상을 가져다준다. 교단 초기에 김영신 교무는 비단으로 말을 장식하지 말라는 뜻에서, "비단으로 자기 몸을 감싸고 허장성세하였다면 나의 앞길은 어찌 되었을까?"<회보 제4호>라고 하였다.

그러면 나의 인격에 손상을 가져다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하는 말에 법도가 없이 방심하거나, 무엇인가에 욕심이 끌려 이를 성사시키려고 침이 마르도록 상대방을 설득하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산종사는 사람이 부정한 짓에 비단으로 꾸며서 싼다고 해도 그 냄새가 밖으로 나타난다<정산종사법어, 근실편 7장>며, 비단같이 꾸미는 행위의 한계를 지적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그것은 곧 악업으로 이어지는 꼴이다. <업보차별경> 31장에서 악업의 하나로 "속으로는 불량한 마음을 품으면서 밖으로는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많이 한 고로 항상 그 몸 주위에 초목이 빽빽하고 가시가 많이 돋친 수풀이 많게 됨이요"라고 하였다.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할 경우의 자신의 인품이 황폐화됨을 경계한 것이다.

따라서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불교에서는 비단같이 꾸미는 말을 하지 말라는 측면에서 '불기어(不綺語)'를 말하였다. <업보차별경> 20장에서 중생이 인도에 태어나는 선업의 하나로써 "속으로 불량한 마음을 품으면서 겉으로 비단 같이 꾸미는 말을 아니함이요"라고 하였으니, 진실한 언어생활을 주문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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