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끄는 말

몇 년 전 배아줄기세포복제 문제로 한국사회가 한바탕 소란스러웠다. 최근에는 프로라이프(pro-life) 의사회를 중심으로 한 낙태반대운동과 프로초이스(pro-choice) 운동 중심 주장인 임신한 여성의 자기 결정권간의 대립이 한창이다. 또한 사형제 폐지국 바로 목전에서 흉악범이 등장할 때마다 등장하는 사형제 존치론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 같은 생명문제 생명윤리 논란의 이면에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자리 잡고 있다. 배아줄기세포 복제 논란의 이면에는 장생불사의 꿈을 꾸는 인류에게 적어도 무병장수를 실현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幻想)이 자리잡고 있다. 70~80년대 산아제한만이 한국 경제발전의 중요한 해결책인양 정부에서 낙태를 암암리에 인정해주던 시기의 낙태문제나, 저 출산율로 인한 노령화와 이 때문에 일어나는 경제발전의 지체 그래서 낙태를 반대해서라도 출산율을 올리려 하는 시도나, 양자 공히 현재보다는 더 잘 살아야 한다는 현대인의 욕망(慾望)이 자리 잡고 있다. 또한 흉악범에 의한 연쇄살인이나 어린아이 성폭행 사건 등의 등장에 주춤해지는 사형제도 폐지 여론의 이면에는 우리사회의 분노(忿怒)가 자리 잡고 있다. 어찌 보면, 온전한 판단에 의해서 생명윤리를 말하기 보다는 그 이면에 있는 환상, 욕망, 분노 등의 요소에 의해서 휘둘리고 있는 모습과 같다.
이러한 모습은 마치『무문관』 제29칙 비풍비번(非風非幡)의 내용과 매우 흡사하다.

어느 날 절의 깃발이 바람에 날리는데, 한 선승은 깃발이 날린다 하고, 다른 한 선승은 바람이 움직인다고 하며, 서로 자신의 의견이 옳다고 주장할 때, 6조께서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그대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라고 하시자 두 선승이 송구스러워 했다.

중요한 생명윤리에 대한 논쟁 이전에 우리는 이미 우리 자신의 기본 마음자세를 잊고 있는 것이다. 생명윤리와 같이 중요하면서도 난해하고 모호하고 어려운 논의를 함에 있어서 이미 흔들린 마음을 온전히 하는 마음의 문제 마음공부의 문제는 필수적인 것이며, 생명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해 가는 ‘위대한 과업’의 출발점이다.
한편 생명윤리의 논란의 이면에는 우리들의 흔들린 마음만이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생명에 대한 기본적인 개념 규정이 편향적인 시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도 매우 중요한 논란의 이유가 된다.
개념이라는 것을 절대적이고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그리 많지 않다. 개념은 철저하게 ‘역사의존적’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상황에 따라 수정 폐기될 수 있으며 새로 만들어질 수 있다. 생명에 대한 개념도 새로운 발견에 바탕하여 그 인식의 틀을 바꾸고 새로운 개념정의를 해야 한다. 이런 필요를 인식한다면, 생명에 대한 우리의 시각이 주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차근히 알아보아야 한다.


2. 생명에 대한 시각 형성

1) 생명 개념에 대한 서구적 시각

현재 우리가 주로 가지고 있는 생명에 대한 정의는 대체로 서구적 시각에 의하여 형성되었다. 서구적 시각이라고 하는 것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서양의 철학적 경향과 문화적 전통에 의해서 형성된 시각을 말한다.
서양 철학은 지적 호기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그러한 지적 호기심은 주로 만물의 근원, 존재의 근원이 무엇(What)인가? 에 대한 존재론적 파악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칸트식 용어를 빌어서 이야기하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인간의 선천적 감성형식 중 서양철학은 자연을 주로 공간적(연장적인 것; 존재,실체,體 )으로 접근해 간 것으로 보인다. 공간적 실체적으로 접근해 간 자연의 대상은 점점 더 분할되어 원자의 단계까지 분할하게 되었다. 그리고 분할된 요소의 합은 전체와 질적으로 동일한 것이라는 강한 믿음을 가졌다. 이러한 서구인의 믿음에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라틴어:Cogito ergo sum)’라는 명제 하에 사유를 본질로 하는 정신과 연장을 본질로 하는 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적 체계를 기초로 근대 이성주의 철학의 기초를 성립하여 자아중심주의(egocentrism)의 입장을 수립하였다. 여기에 뉴턴의 발견은 강한 과학적 확신까지 부여하게 되었다.
뉴턴의 과학적 세계관은 원자론(atomism), 결정론(determinism), 객관주의(objectism) 등으로 요약된다. 원자론은 모든 존재는 시간과 공간속에서 서로 분리된 단일 실체임을 의미하여, 존재 상호간의 관계는 서로 단절되어 있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단일 실체로서의 존재는 그 공간적 위치가 정해져 있어 모든 것은 관찰될 수 있다는 객관주의적 사고가 형성 되었다. 또한 객관적 관찰 자료만 있으면 모든 것을 예측, 통제할 수 있다는 결정론에까지 이르게 된다. 뉴턴의 이러한 과학적 세계관은 모든 존재를 관찰자인 주체와 관찰대상자인 객체로 완전히 분리시킴으로써 모든 존재를 주체와 대상으로 이원화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각각으로 분립된 존재가 모여서 전체를 이룬다는 실체적 존재중심적 사고방식을 하는 경향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 같은 존재론적 사고방식에서는 존재와 존재와의 관계가 상호 대립적 경쟁적 배타적이 될 수 있는 경향성이 아주 강할 수 밖에 없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인간존재 중심으로 세계를 이해함으로써 환경과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타자로 인식하며 그것을 정복하고 조종하며 이용할 대상으로 생각하게 된다.
근대 계몽주의 시대 개인의 발견 및 과학적 성취에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 이러한 존재론적 사고방식은 20세기에 와서는 그러한 존재들 간의 대립관계가 극심해지는 결과를 보이게 된다. 존재론적 사고방식의 궁극적 귀착점은 대내적 독점과 대외적 제국주의와 같은 지배와 흡수의 논리가 된다. 현대사회는 국가와 개인 등 모든 단위에 있어서 자기존재를 강화하는 존재론적 운동의 정점을 보여주고 있다.
존재론적 시각은 생명에 대한 정의에 있어서도 주로 생명을 결정짓는 그 무엇, 생명의 존엄성을 결정지어주는 그 무엇에 집중하여 정의를 내리게 된다. 생명과 비생명, 생물과 무생물, 인간과 자연, 정신과 육체, 영혼과 몸과 같은 이분법적 생명정의가 자리를 잡게 된다. 각각의 생명 간에는 치열한 경쟁의 약육강식 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인식되게 된다. 모든 생명 가운데 인간의 생명이 가장 중요하며, 인간의 생명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로서 영혼의 개념이 중요하게 자리를 잡는 것이다.
이 같은 서구적 시각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또 다른 측면은 서구의 기독교이다. 성경은 인간 생명의 존엄성을 하나님의 신적 본성 중 하나인 인격성을 부여받아 창조된 존재라는 사실을 통해 말하고 있다(창1:27). 성경의 생명관은 神(God)과의 관계에서만 이해된다. 삶과 죽음이라는 말은 원래 종교적인 개념이며, 인간의 손에 달려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神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서양종교이다. 성서는 생명이 철저하게 신의 영역에 속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기독교 전통에 의하면, ‘생명은 신의 창조물이며 생명이 태어나고 죽는 것 역시 신의 영역’이라고 확실히 정의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이 생명을 만들어 낸다거나 조작한다는 것은 신에 대한 도전이고, 이것은 신에 의해 완성된 세계 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라는 것으로 인식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배아복제 문제를 비롯해서 낙태문제 사형문제 등등에 기독교계에서 강하게 반대하는 것은 이런 종교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서구 사회의 정신적 기초는 기독교에 의하여 형성되어 있다. 이런 정신적 기초가 흔들리게 된다면 서구사회 전체가 흔들리게 되는 것이다.
생명에 대한 개념 문제 이전에 이미 서구사회에서는 기존의 자아중심적 패러다임을 대체하기 위한 새로운 담론들을 시작했다. 서구학계에서는 합리성 우위주의와 자아중심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과정철학, 해제주의, 탈중심주의 등의 담론을 이미 시작하였다. 또한 환경운동 및 생물학 등 많은 분야에서 새로운 패러다임 모색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근대시대의 자아중심적 사유방식으로 생명을 이해한다면, 지속적인 갈등에서 빠져 나오길 힘들 것으로 보인다.

2) 생명 개념에 대한 동양적 시각

서구의 학계에서 이미 새로운 패러다임을 모색하고 이에 바탕하여 새로운 생명개념을 모색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모색과정에는 동양적 사유방식 특히 불교적 사유방식이 새로운 패러다밈 모색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는 상황이다. 그러나 서구보다 비교적 근대화가 늦은 동양에서는 서구적 사유방식하의 생명개념 하에서 많은 고민과 갈등을 하고 있다. 본래 동양인의 사유방식 속으로 들어간다면 그런 고민과 같등이 훨씬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서양인들의 지적 호기심이 주로 ‘만물의 근원 존재의 근원이 무엇(what)인가’에 대한 호기심이었다면, 동양인들의 관심은 만물을 운행하는 원리 혹은 변화의 이유(why)에 대한 탐색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양인들이 주로 공간적으로 존재의 근원을 파악해 갔다면, 동양인들은 주로 시간적(운행, 생성적 기능,用)관점으로 접근해 갔다고 본다. 시간적 관점을 가지고서 인간 삶의 체험에 바탕하여 만물의 운행 원리들을 파악해 간 것이다.
삶의 터전이라는 공간에서 그들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하면서 끊임없이 재생되어 나오는 생명이라는 결실이었다. 시간을 통제하거나 관리할 수 있다고 보지는 않았으며, 시간의 변화 속에 하늘과 땅에 만들어 내는 결실 속에 같이 어우러져 인간의 삶을 온전히 영위하고자 한 것이다. 일정한 주기를 가지고 반복되는 시간의 질서 속에서 생명을 키워내고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자 한 것이다. 시간과 생명은 하나로 어우러져 무한의 시간 속으로 녹아들어 가는 것으로 인식한 것이다. 그래서 생명의 한순간을 무한한 시간의 압축된 현상(화엄사상의 一念卽時無量劫)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시간이 생명과 하나이기 때문에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도 매우 자연스럽고, 무한한 시간 속에서 생명을 드러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이다. 동양적 사유세계에서는 시간과 생명이 하나이듯, 자연과 생명도 하나의 생명으로 인식된다. 생명도 하나의 존재론적 의미로 보기보다는 생명을 거대한 하나의 흐름으로 보는 것이다. 생명을 생명 아닌 것과 구분해 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란 분할할 수 없는 흐름이며 전체와의 관계성을 의미한다.
이러한 동양적 생명이해, 자연이해, 자연적응에 대한 내용은 『주역(周易)』에 가장 잘 나타나 있다. 주로 자연의 순환원리와 그에 상응하는 인간의 대응태도를 매우 암시적이고 상징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시간의 변화에 따르는 적절성(時變의 中正), 전체적 상관관계 속에서의 적응성(應和), 대립적인 두 힘의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相反相成; 相生相剋) 그리고 교체순환(交替循環)과 상쇄성(消長), 한 힘의 진행경로가 극한에 이르면 되돌아가는 원리(物極必反) 등으로 표현된다. 다시 풀이하면, '생태적 환경 속에서 각기 자기를 조절하여 전체적으로 균형을 맞추는 방향'으로 움직인다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존재의 생태학적 원리는 전체 혹은 타자에 대하여 언제나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자기조절과 자기변화를 통해 균형을 유지하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교감의 능력, 자기조절능력, 그리고 전체적 균형을 유지하기 위한 자기역할, 이 세 가지가 생태 혹은 생명의 큰 흐름 속에 살아가는 기본 원리가 되는 것이며, 이 생명력은 다른 것과의 관계성 속에서만 발휘되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불교의 연기론, 원불교의 일원상진리 그리고 사은(四恩)의 원리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 입장은 이러한 관계론적 사고방식과 큰 다름이 없다.

3) 현대 생물학과 물리학의 시각

우리가 현대 과학적으로 알고 있는 생명의 특성을 정리해 보면, 생명 또한 고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관계성(關係性)의 총체(總體)임을 알 수 있다. 과학적 탐구범위 확장에 따라 생명에 대한 규정도 광범위해지고 있지만, 기본적 생명의 특징은 신진대사(新陳代謝), 자기복제(自己複製), 자기변화(進化 혹은 變化)이다. 신진대사는 외부와의 관계를 말한다. 생명은 환경에서 화학물질과 에너지를 얻어 자신의 성장과 유지에 이용한다. 물질 및 에너지의 교환을 전제로 하는 열린 체계(open system)인 것이다. 자기복제도 마찬가지이다. 세포분열이나 출산(出産)을 통해서 자신이 지닌 유전자를 다음세대에 전달한다. 또한 생명은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자신을 조절하여 변화한다. 대사, 복제, 변화 이 모든 것은 그 생명 그 자체로 그 생명을 유지시켜 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은 환경과의 관계 속에서 생명현상을 유지해간다.
결국 생명은 생명 그자체로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다른 것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되고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이다. 서구적 존재론적 사유방식 하에서는 생명 그 자체만을 중심으로 사고한다. 그러나 생명은 그 본질상 서로 배타적일 수 없으며 다수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결합된 관계망(關係網)인 것이다. 이 관계망을 생태계(生態界)라고 부르는 것이다.
현대물리학이 밝히고 있는 바에 근거하여도 물질의 궁극적 존재는 입자(粒子)도 아니며 파동(波動)도 아닌 것으로 보고 있다. 현대물리학이 보고 있는 최소존재인 쿼크(quirk)도 점입자(點粒子)로서 질량과 부피가 없는 점(點)이며, 혼자서는 존재하지 못해 세 개가 모여야 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이 쿼크와 매개입자(媒介粒子)에 의하여 구성되는 상호작용력(相互作用力)이 물질을 구성한다는 사실은 기존의 사유방식이었던 서구적 존재론의 근거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생물학의 영역에서도 이와 비슷한 생명전체론(生命全體論) 혹은 공생진화설이 말해지고 있다. 근세 이래 생명현상이 하나 둘씩 물질적으로 해명되기 시작하면서 H.드리슈(1867~1941,독일)는 여기에 전체성의 원리를 도입한다. 드리슈는 세포의 운명이 전체 생물체 속에서 그 세포가 차지하는 위치에 따라 결정된다고 결론지으면서 20세기의 생명전체론의 바탕을 마련하였다.
L.마굴리스는󰡒생명은 공생으로 진화한 개체들의 진귀하고도 새로운 산물이다.󰡓라고 하였다. 우주는 약 150억년 전에 초고밀도의 원초물질이 어떤 힘에 의해 대폭발을 일으켰고 그 힘에 의해 계속 팽창, 변화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이 가운데 약 50억년 전에 태양계가, 45억년 전에 지구가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지구가 탄생한 이래 35억년 전에 가장 먼저 생겨난 생명체인 박테리아는 원핵세포, 즉 핵이 없는 생물체로 보고, 서로 다른 박테리아가 공생하면서 핵이 있는 진핵세포로 발전하였다고 마굴리스는 주장한다. 다윈의 진화론은 강한 것은 살아남고 약한 것은 도태되는 적자생존의 법칙에 따라 자연선택된 형질이 쌓이면서 진화가 일어난다고 본다. 이에 반하여 마굴리스는 합병과 공생을 통해 박테리아가 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생명체를 진화시켰다고 주장한다.
400만년 전에 출현한 인간도 지구상 생명체 진화의 최정점에 있는 것이 아니고 지구상 생명전체의 한 부분으로 하나의 개체생명에 불과하며 인간을 비롯한 개체생명의 생존은 지구상 생명전체에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그 생명전체의 생존과 함께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고방식에 의하면 인간도 자연의 일부일 뿐이며, 전체 생명의 한 부분일 뿐인 것이다.


3. 불교와 원불교의 생명관

1) 불교 생명관의 기본원리

불교의 생명관은 일반적으로 지수화풍(地水火風) 혹은 오온(五蘊)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구사론(俱舍論)』에서 지수화풍의 가시적인 작용(業用), 즉 소지(持), 섭취(攝), 성숙(熟), 증장(長)과 성질(自性), 즉 견고성(堅), 습성(濕), 열(煖), 움직임(動)을 가지고 설명하거나,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오온의 개념을 가지고 생명현상을 논하고 있다.
지수화풍 네 가지 요소 가운데 풍(風)은 생명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생명의 원동력이 되고, 지수화(地水火)는 생명의 재료가 되어 신체를 구성한다고 한다. 오온은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의 다섯 가지 인연의 화합을 말하는데, 이중 수상행식(受想行識)은 일종의 정신적 작용을 하는 것으로 말한다. 수(受)는 감수작용, 상(想)은 상상작용, 행(行)은 의지작용, 식(識)은 요해의 작용을 하는 것으로 말한다. 오온 중에서 식(識)은 육식(六識)을 지나서 알라야식(소위 8식 또는 種子識)에 이르면 생명의 근원에까지 심화되며, 생존을 유지하는 생명자체가 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존재하는 상태란 알라야식이 신체를 집수(執受)하고 있는 상태를 가리킨다. 불교의 원리로 보면 여기에서 중요한 요소로 여겨지는 것이 식(識)이며 풍(風)의 요소인데, 이 요소가 지수화(地水火)와 색(色)에 결합하는 것은 여전히 미스테리한 영역으로 남게 된다. 여기에서 이 식(識,풍,알리야식)을 우리는 흔히 영혼과 동일시하기도 하고 생명을 유지시키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할 점이 있다. 지수화풍이나 색수상행식이나 이들 요소는 본래 실체가 없으며 임시로 화합 서로 관계 속에 있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지수화풍 사대요소나 색수상행식 오온은 서로의 관계성(연기성)속에서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개체로서의 자성은 없다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것은 연기(緣起)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무상(無常)이고 무아(無我)라는 것이 불교의 가장 기본적 입장이다. 이것을 대승불교에서는 무자성 공이라는 맥락에서 논의한다. 즉 무수한 조건들이 끝없이 개입하여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계속 변화해 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연기의 관계를 벗어나 독자적으로 불변적으로 존재하는 자성(自性)은 없다는 것이 불교의 일관된 기본 입장인 것이다.
물론 초기불교에서도 제법무아의 원리에 바탕한 이 같은 설명은 있었으나, 그리 강하게 인식되지 못하였다. 결국 이러한 경향은 아비달마 불교에서는 푸드갈라(pudgala, 補特伽羅)라는 개념을 설정하여 실체를 상정하는 경향을 보였다. 결국 이는 유식의 알리야식에 대한 개념으로 나타나게 된다.
대승불교에서는 대체적으로 개체의 자성을 부정하는 공의 논리를 확립하였으나, 이러한 무자성의 논리를 제대로 인식하기는 그리 쉽지 않다. 어떠한 요소든 그 개체의 자성은 없다는 이야기를 했지만, 대체로 우리는 인간의 속성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로 영혼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2) 영혼 개념 중심 생명관의 오류와 불교적 사유

동양적 사고나 서양적 사고방식에서 너무도 익숙하게 영혼을 중심으로 인간의 생명을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는 심각한 논란의 여지가 남는다. 예를 들어, 정자와 난자가 결합하는 수정 순간에 영혼 혹은 이와 비슷한 개념의 다른 무엇이 태내에 들어와 생명이 형성된다는 견해를 인정한다면, 다음과 같은 문제가 생기게 된다. 우선 수정의 순간 영혼이 유입되어 완전한 생명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생물학적으로 배아 발생 이후 약 14일 까지는 일란성 쌍둥이로 분할 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수정 순간부터 인간의 영혼이 존재한다고 하면 하나의 영혼이 나뉘는 것이거나 다른 하나의 영혼이 추가로 들어오는 것이거나 하나는 영혼이 없는 상태이거나 둘 다 영혼이 없을 수 있다는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임신 후 자연유산의 경우에도 설명이 매우 곤란해진다. 그래서 적어도 약 2주 동안을 배아세포로 보고 쌍둥이의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지는 그 이후부터를 인간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가 있다. 여하튼 영혼 혹은 개체 생명의 자성을 중심으로 생명을 설명하다보면 누구도 피하지 못할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으며, 그리 만족할 만한 답을 얻을 수도 없다.
종교가에서 말하는 영혼 개념은 인류종교문화에서 인간의 존엄성과 생명의 경외성을 담보해내기 위한 소중한 종교적 믿음의 산물로 보아야지 과학적 사실로 보아 서로 충돌해서는 안 될 것으로 판단된다.
이렇듯 사람을 육신과 영혼으로 나누어 보는 영육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이다. 영육이원론적 사고방식은 생명을 완전히 물질현상으로 설명하지 않고, 그 이상의 어떤 특수한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생각 하에 형성된 개념이다. 대체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혼론으로부터 비롯한다고 보는데, 이는 서구적 사유방식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체에는 독특한 성질, 특히 자율성과 자체적 운동을 부여하는 특별한 성질이 있다고 제안하였으며 그것을 생기(生氣․psyche)라고 불렀는데 고대 그리스어로 psyche는 “숨, 영혼”이라는 의미이다. 프쉬케(psyche)는 ‘바람이 분다’ ‘숨쉬다’라는 동사에서 만들어진 말로서, 인간이 의식을 잃거나 죽을 때 몸에서 빠져 나가거나 사라진다고 보았다. 생명의 혼으로서의 생기(生氣․psyche)가 몸에 생명력을 주고, 죽음의 혼으로서의 생기(生氣․psyche)는 사후에 지하세계에 사는 유령으로 간주하였다.
선인(先人)들이 생명의 본질로 생각한 것은 호흡(숨, 氣)이었다. 히브리어의 루아흐(ruah)는 영(靈)과 숨결이라는 뜻을 함께 갖고 있는데, 성경에 보면 하느님이 아담에게 숨, 즉 성령(holy spirit)을 불어넣어 줌으로써 생명을 주셨다고 되어있다. 영혼(spirit)이라는 말 자체는 호흡을 뜻하는 라틴어 spiritus 에서 비롯되었으며, 탄생은 울음소리(첫 호흡)에 의하여 알려지고 생명이 있는 한 호흡은 계속된다고 본다.
힌두교에서도 인간의 삶과 죽음의 판가름을 숨(호흡)의 유무로 결정을 한다. 방금 전까지 온전히 활동하던 육체가 갑자기 그 기능을 상실하고 모든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을 당시의 사람들은 이상하게 보았던 것이다. 아직도 따뜻한 피가 있고 온전한 육신이 있는데, 왜 그 육체가 그 기능을 상실하는가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서 사람이 죽는 순간을 유심히 관찰하였고, 그 결과 호흡이 있느냐 없느냐로 그 죽음 유무를 판가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과학적 장비가 없는 상황에서 인간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통찰 그리고 추정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숨과 함께 무엇인가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 같은 것이 인간이 죽은 후에 인간의 육체를 빠져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렇게 빠져나가는 것을 인도의 베다(Veda) 문헌에는 마나스(manas)와 아수(asu)라는 이름으로 불렀다. 이렇게 인간의 육체를 빠져나간 마나스와 아수는 어떠한 다른 형태로 그 자체가 계속하여 존속된다고 보았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브라흐마나 시대에 들어와서 더욱 발전하여 죽음을 중심으로 멸하는 것과 멸하지 않는 것의 참다운 주체로 프라나(Prāṇa)라는 개념으로 대치가 되고, 후일 시간이 흘러 이 프라나의 개념은 결국 아트만(ātman)이라는 개념 속에 흡수가 되게 된다. 이 아트만은 결국 우파니샤드 철학자들에 의하여 우주의 근본원리인 브라흐만과 동일하다는 범아일여사상에 이르는 것이다.
불교는 윤회의 주체인 아트만을 철저히 부정하고 나온 종교이다. 그러나 윤회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이 비슷해져 버린다. 짧게 그리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힌두교는 유아윤회설이고, 불교는 무아윤회설이다. 무아인데 윤회한다 말이 딜레마로 보이지만, 불교의 무아설은 영혼과 같은 기능과 의미를 지니는 실체적 자아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이 무아설에 입각한 윤회설은 불교의 독특한 형이상학이라고 할 수 있다.
불교 교리의 가장 기본에 형성되어 있는 개념은 영혼 또는 자아의 실체성을 부정하는 무아설에 있다. 이 무아설은 모든 존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는 연기론(緣起論)에 의해서 성립되어 있다. 원불교도 그 사상적 뿌리를 불교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무아설의 입장에서 생명을 바라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원불교의 생명관련 연구 성과

원불교는 20여년의 구도 끝에 깨달음(大覺)을 얻음으로써 성립된 종교이다. 소태산의 대각에 의하여 천명된 일원상 진리로부터 원불교 생명관은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의 대각에서 얻어진 것은 천인일기(天人一氣)의 체험으로 볼 수 있다. 이 체험은 우주의 생기(生氣)요 원기(元氣)요 지극한 기운이라고 말 할 수 있다. 우주에 가득한 천지의 생성력 우주의 무한생성력을 대각을 통해서 체험한 것이다. 일원상진리와 관련지어 유병덕은 원불교 소태산의 생명관을 ‘우주전체가 생생약동하는 생기의 체험에서 드러나게 된 생명관이었으며, 이를 상생상화 상보상조의 길도 인도하게 하는 영지영기(靈知靈氣)의 체험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원불교의 입장에서 생명현상의 본질을 살펴 볼 때, 모든 생명은 고립된 존재가 아니고 수많은 관계의 그물 속에서 서로 영향을 미치며 변화해 가는 하나의 통합된 전체라고 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 그리고 삼라만상과의 관계는 근원적으로 은혜의 관계이며 현상적으로는 창조적 변화를 통해 우주의 궁극적 생명과 하나 되어 커다란 하나의 생명의 장, 생명의 흐름을 형성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의 문제를 환경문제와 관련하여 거론하고 있는 연구자는 김성관이다. 김성관은 생명의 개념을 우주만유의 본원이며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일체중생의 본성이라는 일원상 진리와 모든 생명이 출현하고 유지하는데 있어서 서로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를 나타내는 사은 그리고 무상의 현실세계를 볼 때 우주의 성주괴공과 만물의 생노병사와 사생의 육도변화가 끊임없이 계속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원불교의 생명문제를 직접적으로 거론하고 있는 연구는 서경전에 의해서이다. 서경전은 「소태산의 생명종교사상」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생명의 의미와 경외성에 대하여 정리하고 있으며, 소태산의 사상 속에서 생명을 긍정하는 사상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논문에서는 생명 긍정사상의 교리적 근거를 일원상 진리와 은사상, 불공법 등에서 추출하고 있다.
이어서 박상권은 「소태산의 생명사상」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생명의 의미를 개체적 생명과 전체적 생명의 개념으로 나누어서 인식하고 있다. 또한 원불교의 생명인식에 대해서는 은적 관계 속의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리하고 있다. 그리고 이를 실천하기 위한 실천원리로 순응의 원리, 보존의 원리, 개선의 원리 세 가지를 제시하고 있으면서, 이러한 실천원리들을 원불교에서 제시하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개념으로 통합하고 있다.
이어서 김순금은 「21세기 생명윤리의 과제」라는 논문을 통해서, 현대 유전자 공학의 발전에 따른 생명윤리의 방향을 사은사상에 바탕한 恩윤리에서 찾아야 하고, 이를 실천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논구하고 있다.
이상에서 제시하고 있는 내용들은 생명문제에 대한 원리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세 연구자가 대개 원불교 생명관의 기본 원리를 일원상 진리에서 유추하고 있으며, 보다 구체적으로는 恩사상에 바탕한 은적 유기체 관계 속의 생명윤리를 제시하고 있다. 또한 그 실천윤리 방법으로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불공법을 거론하고 있다.


4.원불교의 생명윤리와 마음공부

1) 원불교의 생명윤리

원불교의 생명관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에 바탕하여, 원불교 생명관의 기본원리와 생명윤리를 정리해보고자 한다.
원불교 생명윤리의 원천 근거는 소태산의 깨달음에 바탕한 일원상 진리에서 찾아볼 수 있다. 소태산은 깨달음 직후 대각의 일성으로 “만유가 한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로다. 이 가운데 생멸없는 도와 인과 보응되는 이치가 서로 바탕하여 한 두렷한 기틀을 지었도다.”라고 하였는데, 이를 ‘일원은 우주 만유의 본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이요 일체중생의 본성이다.’ 라는 교리적 내용으로 정리하고 있다. 이는 우주만유의 존재근거가 바로 일원상 진리에서 비롯함을 밝히고 있고, 우주만유 일체중생이 모두 본래적으로 평등함을 인정하고 있는 내용이다. 이는 본원자요 동시에 만유속의 내재자로서 일원의 진리는 곧 우주만유의 나무 한 그루 풀 한포기에 이르기까지 갊아 있지 않음이 없다는 것이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원리는 우주 만유가 이름은 각각 다르지만 그 본성에 있어서는 일체의 유정 무정이 원만평등한 일원의 진리에 근원해 있다는 것으로 이것은 모든 생명체가 하나임을 밝혀줌으로써 생명에 대한 경외스러움과 존귀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나아가 우주의 생명체 및 모든 존재는 존귀하고 소중한 것이니 생명을 대하고 접할 때 경외심을 갖고 대할 것을 제시 할 수 있는 것이다.
일원상의 진리가 우주만유의 본체적 원리의 파악이라면 은(恩)은 우주만유의 현상적 존재파악으로서 일원상 진리의 구체화는 바로 사은(四恩)이다. 사은은 우주만유를 천지 부모 동포 법률의 네 가지 은혜로 대별하는 하는데, 소태산은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 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 아님이 없나니”라 하여 우주만유가 각각 본래적으로 평등함과 동시에 경외와 불공의 대상임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사은에 대한 의미 설명에 있어서 “우리가 천지에서 입은 은혜를 가장 쉽게 알고자 할진대 먼저 마땅히 천지가 없어도 이 존재를 보전하여 살 수 있을 것인가 하고 생각해 볼 것이니 그런다면 아무리 천치요 하우자라도 천지 없어서는 살지 못할 것을 다 인증할 것이다.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가 있다면 그 같이 큰 은혜가 또 어디 있으리요” 라고 설명하고 있다. 여기에서 ‘없어서는 살지 못할 관계’라는 표현에서 볼 수 있듯이, 우주만유는 서로가 서로의 관계 속에서 서로의 존재와 생명을 가능하게 해주는 관계임을 알 수 있다. 없어서는 살 수없는 은혜의 관계로서 사은은 인간사회의 질서유지에 필요한 수단이나 당위개념만이 아니라, 우주에 갊아 있는 생명력(生命力) 조화력(造化力) 무한은(無限恩) 절대은(絶對恩)인 것이다.
은사상(恩思想)은 서구 과학주의의 존재론적 사유 방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생명관으로 현대 환경 및 생명의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해법의 근거가 된다. 나와 모든 존재와의 관계는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서 모든 존재 자체가 바로 은이기에 나의 생명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모두 살려주고 살림을 받는다는 관계론적 생명관이다.
소태산은 이 같이 일원상 진리와 사은의 원리에 바탕하여 불공법으로 실천윤리의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소태산은 불공법에서 “우주만유는 곧 법신불의 응화신이니, 당하는 곳마다 부처님이요 일 일이 불공법이라 천지에게 당한 죄복은 천지에게 부모에게 당한 죄복은 부모에게 동포에게 당한 죄복은 동포에게 법률에게 당한 죄복은 법률에게 비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불공법이 될 것이니라.” 라고 하여 실제적인 불공법을 밝히고 있다. 또한 소태산은 보다 구체적인 불공의 방법을 설명하고 있는데, 또한 “일원상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사은이요 사은의 내역을 말하자면 곧 우주만유로서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부처아님이 없나니 우리는 어느 때 어느 곳이든지 항상 경외심을 놓지 말고 존엄하신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 천만 사물에 응할 것이며 천만 사물의 당처에 직접 불공하기를 힘써서 현실적으로 복락을 장만할 것” 라고 하여 천지만물 허공법계에 모두 일원의 진리가 갊아 있기 때문에 부처님을 대하는 청정한 마음과 경건한 태도로서 불공하자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생명체를 포함한 우주만물 그 자체가 바로 부처임을 말하는 것이다. 아울러 모든 존재를 대할 때 “어느 때 어디서 어떠한 사람을 대하거나 어떠한 물건을 대하거나 오직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내용으로 처처불상(處處佛像) 사사불공(事事佛供)의 구체적인 방법론에까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원불교의 생명윤리는 기본적으로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에 바탕한 관계성의 원리 그리고 동양적 관계성의 원리인 주역의 원리와 다름이 없다고 볼 수 있다. 나아가서는 창조주(創造主)의 절대적인 은총을 입고 있다는 사실로 기독교의 창조론을 이해 해석한다면, 기독교의 생명윤리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수용 될 수 있다고 본다.
원불교의 삼동윤리에 모든 종교의 근본적 진리는 다 같이 하나의 바탕에 근원해 있다는 동원도리(同源道理)는 이러한 교리적 만남의 원리가 되고, 이 세상의 무수한 생령들이 그 이름은 달리하고 있으나 그 근본은 다 같은 한 기운으로 연계되어 있다는 동기연계(同氣連契)는 원불교 생명 실천윤리의 근거가 된다고 할 수 있다.

2) 원불교 생명윤리의 실천원리

원불교 생명관 및 생명윤리의 교리적 근거를 소태산이 깨달은 일원상의 진리가 우주에 가득한 천지의 생성력 우주의 무한생성력과, 이를 현실적 구체화의 모습으로는 사은, 각각의 당처에 불공법에서 탐색하여 보았다. 이 같이 일원상 진리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생성력이라고 한다면 원불교 생명윤리의 실천원리는 생명의 기본적 특징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기본적 생명의 특징은 신진대사(新陳代謝), 자기복제(自己複製), 자기변화(進化 혹은 變化)라고 본다면, 박상권이 생명의 실천원리로 제시하고 있는 순응(順應)의 원리, 보존(保存)의 원리, 개선(改善)의 원리를 생명윤리의 실천원리로 보았는데, 이는 생명의 기본적 특징에서 도출한 원리로 보인다. 즉 순응의 원리는 생명이 신진대사, 보존의 원리는 생명의 자기복제, 개선의 원리는 생명의 자기변화(進化)에 해당되는 내용인 것이다.
우주 대자연은 일정한 운행의 법칙과 질서를 가지고 있는데, 대자연의 품안에 있는 존재들은 이 도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 순응의 원리이다. 생명의 특징인 신진대사도 우주 대자연의 운행의 법칙과 질서 속에서 물질과 에너지를 교환하는 순리의 방향에서 진행되면 아무런 문제가 야기 되지 않는다. 그러나 역리의 방향 혹은 무리한 방향에서 진행되는 것은 항상 다른 형태의 대가를 치르게 되는 것이다.
만물은 자연의 품안에서 살다가 자연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지만 그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니다. 그 흐름 가운데 만물은 또 다른 형태로 자기 존재를 보존하는 것이다. 생명의 특징 가운데 하나인 자기 복제도 다음세대에 자신의 존재를 전달하여 생명의 흐름을 형성하듯이 가능한 많은 생명이 자연적 조건하에서 자기 종의 전달이 가능할 수 있도록 보존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물은 생명이 흐름이라는 기나긴 시간 속에서 자신을 끊임없이 변화시키고 있다. 만물이 기나긴 시간 속에서 만물을 변화 진화 시키는 것은 생명이 환경에 적응하여 이로운 방향으로 자신을 조절하여 변화시키는 것과 같이 매우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가운데 인간은 매우 짧은 시간 속에서 새로운 변화를 추구한다. 과거에 비하여 많이 개선되어온 문명의 흐름은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근시안적 인간의 안목으로 무리한 변화를 추구하는 것은 균형과 조화를 깨트리는 결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 개선의 원리는 순응과 보존의 원리에 비해서 더욱 유의해서 진행해야할 생명의 실천윤리라고 할 수 있다.

3) 원불교의 마음공부

우리는 현대사회의 생명윤리를 논의함에 있어서 우선 우리들의 마음자세에 그름은 없었는지를 면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은 당연하다고 할 것이다. 분노, 욕망, 환상에 사로잡혀 생명윤리를 논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흔들리는 마음을 추어잡고 분노, 욕망, 환상은 없는지 면밀하게 살피는 것이 마음공부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만이 원불교의 마음공부는 아니다. 원불교 마음공부는 궁극적으로 일원상진리와의 만남을 의미하며, 일원상 진리와의 만남을 넘어서 일원상 진리의 활용이 원불교의 마음공부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원불교 생명윤리의 교리적 근원이 바로 일원상 진리와 사은 그리고 불공법인 이유를 넘어서, 원불교 마음공부는 바로 일원상 진리와 사은 삼학 그리고 이를 수행하기 위한 불공법 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는 생명관에 대한 새로운 패러다임의 내용을 담지하고 있다. 일원상 진리는 동양적 사유방식 불교적 사유방식과 같은 관계론적 맥락에서 생명을 이해하고 개념 짓고 있다. 그동안 서구중심적 사고방식으로 생명을 이해하면서 많은 갈등과 곤란한 상황에 처했으나, 관계론적 개념으로 생명에 대한 이해를 하면, 많은 갈등 상황이 줄어들 것으로 판단된다.
최근 원불교 마음공부에 대한 각각의 방법론 등이 대두되면서 현장에서 그 실효를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상당수의 마음공부 방법론이 일원상 진리 및 삼학 사은과의 관련을 맺지 않고 그 방법론 자체에만 치우쳐 있는 듯한 경향이 있다. 현상적 치유로서 마음공부만이 아니라 근원적 진리와의 만남을 가능하게 하고, 진리를 실제생활에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원불교 마음공부의 진면목이라고 할 수 있다.
원불에서는 자기 마음을 닦아서 경계와 내가 하나가 되는 수양법으로 내수양과 외수양 두 가지 방면에서 마음공부의 방법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주객일체·물심일여의 경지에 도달하는 내수양법을 네 가지 단계로 밝히고 있는데, 이를 잘 연구 활용하면 일원의 진리와 만날 수 있으며, 그 활용까지 가능한 마음공부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 네 가지 단계는 다음과 같다 첫째 집심(執心)공부염불·좌선을 할 때나 또는 어느 때든지 항상 자기 마음을 붙들어서 움직이지 아니하고, 몸과 마음이 바깥 경계에 끌려가지 않게 하는 것을 말한다. 둘째 관심(觀心)공부·집심공부가 잘 되면 마음을 턱 놓아버려 유유자적 하면서 마음 가는 것만 살펴 망념이 일어나는 것만 살피는 것을 의미한다. 세째 무심(無心)공부‧관심공부가 잘 되면 마음을 본다는 생각도 놓아 버리고 경계와 내가 하나가 되어 동정(動靜)이 다 「참」으로 나타나는 경지를 말한다. 넷째 능심(能心)공부‧무심공부가 잘 되면 마음이 항상 성품을 떠나지 아니하고 기틀 따라 운용하되 자유자재하고 만능 만덕이 겸비한 것을 의미한다.
생명윤리의 논란 상황에 있어서 우리의 환상 욕망 분노를 보고 흔들리는 마음을 잡았다면, 이제 마음공부의 첫 단계에 진입한 초보자의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마음공부의 길은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과 그리 쉬운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진지한 수행인의 자세를 잡아야 진정한 마음공부가 가능할 것이라고 본다.


5. 마무리

본고의 목적은 서구적 생명개념 하에서 갈등을 지속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생명윤리에 일어나는 갈등을 최소화하고 새로운 생명개념을 정착시켜야 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아울러 분노, 욕망, 환상으로 흔들리는 마음을 바로잡고 생명 본연의 관계적 연기적 구조를 철저히 파악하고 이를 삶 속에서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새롭게 등장하는 자연 친화적 문명 패러다임은 자연을 생명 에너지가 분출하는 생명의 원천(source of life)으로 간주한다. 자연 친화적 문명의 패러다임은 동양의 사유방식에서는 무척이나 친숙한 방식이며,『주역』의 원리나 불교의 연기적 사유방식, 원불교의 일원상 진리는 그 관계론적 패러다임과 일맥상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동안 가져왔던 자아중심적 패러다임을 벗어나 이제는 관계론적 패러다임으로 전환해야 할 필요가 있다. 서구도 사유방식의 전환을 다각도로 모색하고 있는 시기이며, 그 대안적 사유방식을 동양의 관계론적 패러다임에서 찾고 있다. 서구 문명의 영향권 아래에서 살아간다고 해서 모든 개념을 서구적으로 사유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본래의 사유체계로 돌아가 할 것이다.
그러나 생명에 대한 사유체계를 전환하는 것은 쉬운 작업은 아니다. 예를 들어 동서양에 공통적으로 만연한 개체 자아 중심적 사고방식 영혼 중심적 생명이해라는 틀을 벗어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관계론적 사유방식에 보다 더 철저해지지 않으면 자아 중심적 영혼 중심적 생명개념의 함정 속에 빠지기가 쉬울 것으로 보인다.
원불교에서는 일원상 진리에 근거하고, 없어서는 살수 없는 관계라는 사은의 윤리에 철저하면서, 천지만물 허공법계 모두를 불공의 대상으로 여기는 처처불상 사사불공의 정신을 실천하는 것이 원불교 생명윤리의 기본 원리이다. 동시에 이는 원불교 마음공부와도 직결되는 것이다. 지극히 미미한 출발로 보이지만, 마음공부는 실제에 있어서 자신의 바꾸고 세상을 바꾸는 위대한 과업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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