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성훈 교도·남산교당(논설위원)
현애살수(懸崖撒手)! 매달현, 언덕애, 펼살, 손수! 언덕 위의 소나무에 매달려 마지막 한 손을 놓는다는 뜻이다. 관념의 끝이요, 언어도단이요, 논리가 통하지 않는 곳이요, 공(空)과 무(無)를 깨닫는 순간이다. 종교의 모든 이치를 알아 정수를 이해할 수 있는 길이다.

이런 훈련은 아주 효과적인 결과를 맛 볼 수 있다. 먼저 산에 오른다. 두 손으로 나무에 매달린다. 한 손을 놓는다. 마지막 한 손을 놓는다. 여기서 어렵다. 산을 오르고 나무에 매달리는 것은 일상의 훈련이다. 그러나 마지막 시도에서 항상 물거품이 되고 윤회의 바퀴를 빠져나올 수 없다.

생각과 사변으로만 접하는 법문에는 한계가 있고 오히려 덫이 될 때도 많다. 마지막 한 손을 놓은 것은 논리의 모순이요 정상적이고 과학적인 사고가 아니다. 대각여래위이신 대종사님은 한 손을 놓으라신다. 대각개교절을 맞는 진정한 뜻으로 우리 모두 한 손을 놓아보자. 그 결과는 스스로 알 뿐이요, 체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다. 말로는 모두 거짓말이다. "…" '달인'은 "해보지 않고는 말을 말라"신다.

밑을 보면 아득한 위험이 있고 겁이 나는데… 자 마지막 한 손을 이제 놓자.
왜 그 손을 놓지 못하는가? 그 이유 하나를 알면 좀 쉬울 것 같다. 만약 이 몸이 남의 것이라면 우린 금방 놓을 수가 있다. 내 몸이 아니니까!! 더구나 내가 싫어 하는 사람의 몸이라면 뒤도 안돌아 보고 놓을 수 있다.

그러나 내 몸이기에 놓지를 못한다. 자기는 안놓으면서 상대에겐 죽으라 놓으란다. 내 자식이기에 포기하지 못한다. 모두 내 것이라는 집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한 무수한 한계가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가지 못한다. 법리와 이치를 따지기 전에 '나'라는 국한을 넘지 못하면 천지와 통할 수 없다. 천지여아동일체가 되려면 내가 없을 때 천지와 같게 된다.

어렵지만 그 가장 큰 마장은 나라는 것이다. 왜 나를 버리지 않고 고통 속에서 살려고 하는가? 나를 구속하는 가장 큰 마구니가 바로 나인데. 내가 구속하는 나를 누가 구제할 수 있겠는가? 무아봉공, 지공무사, 사은, 자리이타 이 모든 대종사님이 주창하신 일체법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남과 함께 살자는 가르침일 것이다. 나의 욕심만 채우고 남을 배려하지 않는 일체는 대종사님의 진정한 가르침이 아니다.

자, 매일 이 훈련을 해보자. 마지막 한 손 놓기는 내 몸을 던질 때 가능하다. 즉 목숨을 바쳐야 한다. 목숨걸지 않고 되는 일은 없다. 진정한 것이라면 내 몸을 다 바쳐야 한다. 그만큼 중요한 일을 우린 이미 찾아 95번째 기념식인 대각개교절을 가졌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내 것이 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없는 참 나를 찾자. 진정 나를 버릴 때 오히려 나를 만나고 남과도 하나 되는 나를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내가 사라질 때 우린 진리와 접할 수 있다. 아상이 떨어지는 것이다. 나와 함께 만유가 한 체성이다. 투명한 창문으로 세상을 온전하게 볼 수 있다. 논리와 색깔이 없으니 즉 나라는 관념이 없으니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다.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일상의 우리는 분명 색깔 있는 창문으로 세상을 보고 있다. 빨간 안경으로는 항상 세상은 빨갛게 보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각자의 색깔이 있는 안경을 끼고 우린 살아가고 있고 현애살수를 통해서 자신의 색깔 있는 안경을 벗을 수 있다.

그리고 이제 우린 더 할 일이 많다. 100년 기념사업을 멋있게 해야 하고 다가오는 북한과의 상승발전하는 계기를 마련해야 한다. 중국, 인도에 대한 대비 등 국외로도 원불교가 할 일이 태산이다.

여기서 진정 상대 국가를 배려하고 상대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아이디어를 찾아 실행한다면 상대국과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결과가 나오는 것은 자명할 것이다.

쉽게 말해 중국을 발전시킬 능력과 혜안을 길러야 우리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으며 이는 나와 너의 국한을 넘는 자리에서 생각한다면 무한한 가능성을 도출할 수 있다. 내가 없을 때 모든 상대와 함께 할 수 있는 비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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