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금을 통하여 가무(歌舞)란 어떤 상황에 우리 심신이 흥에 겨워 율동이 시작되는 것으로 긍정적 측면에서 거론되곤 한다. 부족국가 시대의 제천행사로서 부여의 영고라든지 예의 무천, 고구려의 동맹 등에서 행해진 의식은 이러한 가무의 초기형태이다.

아무리 흥에 겹다고 해도 가무는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하는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낭유로 치닫는 일이 많다. 다시 말해서 예에 벗어날 경우에 가무가 음탕해지고, 낭유의 유혹이 커진다는 것이다. 낭유(浪遊)란 개념도 '사치스러운 놀이'에 빠지는 것을 말한다.

여기에서 예 아닌 가무와 낭유가 죄의 근원이 되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확실히 알아야 한다. 예 아닌 가무란 정당한 축하의 무대가 아닌 곳에서 춤추는 것이니 정신을 혼미케 하기 때문이요, 예 아닌 낭유란 주색잡기로 재산을 탕진하여 고통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원기18년 김영신 선진은 <회보> 5호에서 다음의 감상을 기록한다. "가련한 카페 여성들이여! 웃음과 춤으로 사람들의 정신을 마취하여 일시적 안락을 구하는 비루한 생각을 가졌느냐"며, 고해에서 방황하는 무리들을 구원하자고 힘주어 말하였다.

주지하듯이 초기교서 〈수양연구요론〉이 발간될 당시는 원기12년의 일로서 물질문명의 발달로 인하여 정신세력이 약해지는 암담한 상황이었다. 민중들은 당시의 고통을 모면하기 위해 가무와 낭유로써 인생을 흥청망청 보내는 것이 다반사였다. 춤바람이 나고 도박에 빠져 패가망신하는 가족들이 속출하였던 것이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인지한 정산종사는 말한다. "요즘 어떤 여자들이 춤에 빠져 남편과 자식도 몰라보는 사람이 많다고 하니 큰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재물욕이 많은 사람은 술이나 잡기쯤은 설혹 마음에 끌리지 않는다 할지라도 재물을 보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눈이 활짝 뒤집혀서 갖은 추태를 부린다〈정산종사 법설〉." 이처럼 남녀를 불문하고 춤에 빠져 가정을 버리고 낭유에 떨어져 재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도시는 물론 농촌사회를 부패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하였다. 초기교단에서는 '길룡교풍회'라는 것을 결성하여 예 아닌 가무와 낭유의 폐풍을 극복하려 했던 흔적이 나타난다. 1929년 영광교당 부근의 마을 사람들이 잡기와 과음의 폐풍이 유행하자 불법연구회 회원들에게까지 물들 염려가 있으므로 정산종사는 구동, 영촌, 범현동 세 마을의 주민들을 규합하여 길룡 교풍회를 조직하고 인륜 기강을 세워서 잡기나 과음을 엄금하며 미풍양속을 장려 실행케 하니 당지의 각 기관에서도 매우 칭찬하였다. 본 문목은 〈정전〉 계문의 특신급 10조에서도 강조되었으니, 처음에 춤을 좀 추었거나 낭유를 했다고 해서 큰 문제가 없을지라도 그것은 중독의 특성을 지니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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