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은 진실이 묻어 나올 때 감동한다"

언론의 가치 어디에 두느냐 관건, 비판과 분석 희미한 논조 아쉬워

올해 획기적인 변화를 모색한 본지는 6월1일 창간일을 맞았다. 이에 본지 창립 멤버로 오랫동안 활동했던 서전주교당 박혜명 교무를 법당에서 만나 그동안의 과정에 대해 들어 보았다.

- 본사 창립 구성원으로서 소회는.
원불교신문 발행은 원기53년 교무 강습 공청회에 이어 제12회 임시교정위원회에서 결의된 것이다. 이에따라 신문 창간 준비 작업에 들어갔다. 구정원에서 집무를 보면서 3월1일자로 창간호를 내려고 했으나 벽에 부딪쳤다. 문공부 허가를 받는 줄 몰랐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러다 정신원 건물에서 신문 준비 작업을 하다 4월에 정화원 3층으로 사무실을 이전한 후, 5월27일 문공부에 등록절차를 밟게 됐다. 그래서 창간일이 6월1일로 된 것이다. 당시 초대사장은 김정용 교무, 주필 이공전 교무였다. 편집국장은 조정근 교무였고 취재부장은 원불교청년회보를 담당했던 이청남씨, 편집담당 이성은 교무, 나는 문화면 담당을 했다. 그리고 원기62년 업무국장, 원기74~80년 업무국장 겸 편집국장을 맡았다. 현 원불교신문사가 있는 원불교문화회관은 원기68년 개원식을 가졌다.

- 첫 근무지로 신문사에 오게 된 동기는.
원광대 원불교학과 졸업할 무렵에 신문사가 설립됐다. 재학시절 서원관 사감이었던 전팔근 교무가 "너 학보사 가서 기사나 써라"며 이야기 한 것이 기연이 된 것 같다. 그러나 학보사 발송할 때 풀칠만 몇 번 했다. 아마도 타종교 연구반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으로 '퓨리턴(청교도)의 종교 개혁'에 대한 논문을 썼다. 그냥 쓰고 싶어서 쓴 것 뿐인데 원불교학과가 생긴 이래로 여학생이 논문을 쓴 것은 처음이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신문사로 발령 받게 된 것 같다. 이렇듯 신문에 대해 정식으로 교육받은 일은 없었다. 저널리스트 기질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졸업후 면담을 통해 우연찮게 신문사로 발령받게 됐다. 창간호 특별좌담에서 "바른 언론지가 되라"는 동국대학교 이기영 박사의 말에서 많은 느낌을 받았다.

- 초기 신문 제작은.
원기74년 20주년 행사는 총부 대각전에서 했다. 단체에서 몇 주년 행사라는 이름으로 행사를 한 것은 처음이었다. 그때는 몇 주년이란 이름을 붙이고 하는 행사가 거의 없었다. 그 당시 신문 활자는 6.3 포인트였다. 글자를 어떻게 하면 작게 하느냐가 유행이었다. 일반적인 추세에 따랐다.

지금 생각하면 노인들이 읽는다는 것은 생각을 못했다. 원광사가 시내에 있는 관계로 철길 따라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월요일에 신문을 제작하면 목요일에 발송을 했다. 발송은 풀을 끓여서 했다. 그 당시 원광사는 동판제작 시설이 없었기 때문에 동판은 전북일보사에 가서 떠왔다.

- 신문에 있어 중요한 핵심은 무엇인지.
신문사에 근무할 때 혼난 일도 참 많았다. '동남풍'이라는 코너와 관련해 숭산 박길진 총장님과 의견 충돌이 있기도 했다. 그때는 가십 기사도 많이 내보냈다. 이처럼 신문은 작가의 입장에서 벗어나 평론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교단을 바라보는 시각이 확실해야 한다. 신문이 제도권에 있으면 그 가치를 이끌어 낼수 없다. 한계는 분명히 있다. 그러나 그 가치를 이끌어주는 것은 역시 언론일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신문은 내용이 중요하다. 내용을 많이 담으려고 하기 보다 신문이 지향하려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찾아야 한다. 지금은 옛날보다 많이 유연(?)해 진것 같다.

영국의 한 언론인은 "신문이 오피니언의 기능이 충실하지 못하면 신문이라고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의견과 분석이 없는 신문은 그냥 종이에 불과하며 영혼이 없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 기능을 하려고 하면 부딪힐 수 밖에 없다. 같은 표현이라도 얼마나 성숙하게 하느냐가 관건이다. 언론은 권력지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단의 가치를 세워주되 좋은 것은 좋다고 말할 수 있고, 아닌 것은 아니다고 지적할 수 있어야 한다.

- 신문에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요즘 신문을 보면 일반교무나 아무 힘없는 교무들에게 힘을 주는 논조가 없다. 점점 희미해지는것 같다. 아쉬운 부분이다. 언론으로서 권위를 갖는 게 무언인가를 고민해야 된다. 무조건 진보가 아닌 정말 인간적 가치가 무엇인가? 고민하는 내용이 담겨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강자에게는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하다. 언론은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는 유연해야 하지 않을까? 이름없는 별이 되어도 가치관과 확고한 진실이 묻어나는 삶이 종교인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권위주의에 익숙해서는 안된다.

- 신문사의 공로자를 든다면.
신문에 대해 이야기 하면 여러 사람을 거론할 수 있지만 손정윤 교무를 빼놓을 수 없다. 손 교무는 교단에서 생각하지 못한 일을 해 냈다. 신문을 내야 된다며 어른들을 찾아다녔다. 가로 편집도 손 교무의 단안이었다. 우리는 세로 편집에 길들여져서 가로편집을 하면 어찌되나 했는데 손 교무가 획기적으로 시도했다. 지금 가로 편집을 안했으면 아마 힘들었을 것이다. 그때 일간 신문들도 가로편집을 했다. 가로편집은 교세와 보수성에 비해서 상당히 진보적이고 빨랐다.

- 〈구도역정기〉 등 그 당시 신서들을 많이 발행한 소감은.
초창기에는 사회저명 인사의 글을 많이 받았다. 지금 읽어봐도 참 좋다. 〈구도역정기〉도 처음에는 고민했는데 의외로 말씀들을 잘해 주시고 반응도 좋았다. 지금 하라고 하면 못할것 같은데 그땐 겁 없이 했다. 성산 성정철 종사님이 1번으로 했다. 숭산 박광전 종사님은 처음에 안하려고 하시다가 했는데, 하고 나서 얼마 있다가 돌아가셨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다.

당시 형편은 인쇄물이 그렇게 많지 않아서 학교가 방학을 하면 원광사가 일이 없어 한가했다. 〈신앙실록〉을 처음 발행했을때도 라디오에서 '파도를 타고'라는 방송을 했는데 여기에서 아이디어를 가져왔다. 〈신앙실록〉 1권이 처음 출판되었을때 독자가 상당히 많았다. 재가교도들의 이야기가 꾸밈없이 엮어졌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종교신문으로서 나아갈 방향은.
종교신문은 가치를 어디에 두느냐가 관건 이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제일 중요한 것이 가치이다.

그러므로 종교신문은 실제적인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정말 사람냄새가 났으면 한다. 신문은 문학지가 아니다. 따라서 원불교만의 진실된 가치를 바탕으로 해야한다. 다른 종교를 흉내내서는 안된다. 신문은 진실이 묻어나올 때 감동한다. 제도권에서는 싫어할 수도 있지만 언론의 제일 핵심이 의견에 대한 분석과 비판이 확실하게 들어있어야 한다.

나는 1면부터 끝까지 본다. 신문이 속속들이 보지는 않지만 눈에 띄는 제목이 있으면 읽는다. 신문지면 중에서 제일 중요한 란은 사설이다. 사설속에 그 신문의 논조와 흐름이 제시되어야 한다.

신문은 자체적으로 겸허해야 한다. 특히 돈과 권력에 찌들어 있는 강자에게 약해지지 않는 자긍심이 필요하다. 강자에게는 강하고, 약자에게는 부드러워야 한다. 단순한 것이라도 사람을 차별하지 말고 평등 해야된다.

대담 육관응 yuk@wo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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