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담양 소쇄원.
고래로 한국인들에게 산수는 단순한 산과 물이 아니라 총체적인 자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특히 선비들에게 있어서 산수는 도(道)의 본질이 내재된 존재로, 지형적·물질적 세계가 아니라 철학적·정신적 세계였다. 이로인해 그들은 항상 산수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가서 정자나 누각을 짓고 자연을 즐기면서 물아가 일체 되기를 원했다.

이처럼 누정을 짓고 풍광을 즐기면서 자연과 교감을 나누게 되면 자연은 감상자의 심정적 소유물이 되면서 인문화 된다. 인문화 된 자연은 이미 자연 그 자체가 아니라 제2의자연으로 탈바꿈하여 정원의 성격을 띠게 된다. 이것이 한국 산수정원의 핵심 원리이자 기본 개념이다.

가든과 산수정원
현대인들은 정원의 개념에 대해 보통 잘 정리된 잔디밭, 장미 울타리, 분수와 금붕어 노는 연못, 잘 가꾸어진 상록수 등을 떠 올린다. 그런데 이것은 서양의 가든(garden)의 모습이니 어찌하랴. 가든은 유럽을 비롯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등 감상할 만한 자연 풍광이 많지 않은 지역에서 형성된 개념이다.

서양인들은 가든을 조성할 때 화초와 나무 등 자연물을 인위적 공간에 옮겨와 보기 좋게 배치하고 자연을 재현시키는 방법을 쓴다. 때로 눈을 즐겁게 하기 위해 분수나 조각품 등의 조형물을 눈에 잘 띄는 곳에 배치하는 것 또한 가든 조성의 중요한 일 중 하나다.

한국 전통 정원의 개념은 가든의 그것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무엇보다 큰 차이는 사람이 직접 대자연 속으로 들어가 자연 자체를 정원으로 삼아 즐긴다는 점이다. 그럴 사정이 못되는 경우라면 집 주변의 자연 경관을 최대한 보존하고, 차경(借景)의 원리를 이용하여 경치를 내 편으로 끌어들이는 방법을 쓴다. 인간 중심이 아니라 자연을 우선하고 중시 한다는 점, 이것이 한국 산수정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다.

자연 경관이 정원이 될 수 있는 것은 그 가운데에 누정 등의 시설물이 있고, 그곳에서 자연을 대상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 아는 담양의 소쇄원도 그와 같은 성격을 가진 정원 중 하나다. 정자 앞을 흐르는 계류, 바위를 스치는 폭포, 사철 푸른 대나무, 멀리 보이는 무등산 영봉들이 모두 정원의 구성요소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이 모든 것들은 조성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가 산수 가운데 좋은 뷰포인트를 골라 광풍각을 짓고 주변 경관을 감상의 대상으로 삼고부터 모든 것이 정원의 구성요소로 탈바꿈한 것이다.

산수정원에서는 철따라 모습을 달리하는 산천초목은 물론이거니와 헤엄치는 물고기, 수면에 떠도는 흰 구름, 공산에 걸린 달, 솔바람 소리, 새소리 등 자연계의 모든 시청각 요소들이 감상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대자연을 모체로 하는 산수정원은 원천적으로 주인이 없다. 누구나 스스로 자처하면 산수정원의 주인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설사 산야의 실제 소유주가 따로 있다 해도 그것은 풍월주인에게 아무 문제도 되지 못한다.

옛 선비들은 산수 가운데 선 누정에 올라 소요를 즐겼다. 때로 자연의 도와 인간의 근원적 문제에 대해 사색하기도 하고, 몸과 마음을 닦는 일도 잊지 않았다. 산수정원은 선비들에게 인간 본성을 회복하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해 주었고, 선비들은 자연의 도리를 스스로 조종하는 수양의 방법으로 삼았다. 산수정원은 이처럼 단순한 자연경관 이상의 의미를 가진 공간이었다.

산수정원의 상징세계

어느 누가 "송죽은 푸르고, 단풍은 붉다"고 했다면 그것은 경치를 객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아름다운 경치에 눈이 휘둘린다"고 말했다면 그것은 마음에 이는 흥취를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청산은 만고에 푸르고, 유수는 주야에 그치지 않는고, 우리도 그치지 말아 만고상청하리라"라는 시를 읊었다면 이것은 눈앞의 경치에서 사람이 배워야 할 이치를 발견해 낸 것이다.

자연의 이치는 주관과 객관이 합치되는 데서 발견된다. 상징성 역시 객관적 사실과 주관적 감정의 통합에 의해 이루어진다. 푸른 낙락장송이 절개의 상징이 되고, 사시장철 흐르는 계류가 영원성의 상징이 되며, 잔설 속의 매화가 청절(淸節)의 의미로 인식되는 것은 모두 주관과 객관의 통합작용의 결과다. 급류 속에 쓸려가지 않고 우뚝 선 바위가 지조와 절개의 상징이 되고, 정원 속의 은행나무가 공자의 행단(杏亶)으로 상징되는 것도 마찬가지 원리다. 결국 산수정원은 자연의 세계이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각에 의해 상징의 세계로 탈바꿈하기도 하는 것이다.

산수정원의 미래

우리나라는 '산수정원의 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국에 산재한 수천 수백의 누각과 정자가 그것을 잘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이처럼 많은 정원을 갖고 있으면서도 유럽은 물론, 동양의 중국이나 일본과 비교해 봐도 조원(造園)기술과 원예기술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다. 그 까닭은 무엇일까?

원래 샘 파는 기술은 건조지대에서 발달하고, 방한의 기술수준은 혹한 지대일수록 높다. 마찬가지로 경치가 삭막한 나라일수록 조원과 원예기술이 더 발달한다. 이를 뒤집어 보면 샘 파는 기술과 방한 기술이 발달하지 못하고, 조원과 원예기술 수준이 낮은 나라는 그만큼 풍광이 아름답고 살기 좋다는 말이 된다.

한국 산수정원의 전통의 모태는 바로 금수강산이라고 하는 천혜의 자연환경이다.

자연환경이 파괴되면 산수정원은 존재할 수 없다. 산수정원의 미래는 우리를 둘러싼 천혜의 자연 환경을 얼마나 잘 보존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다.
▲ 허균 / 한국민예술연구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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