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다원사회에서 새종교인으로 거듭나기
한국사회, 종교지형 다원화 시켜
종교의 다양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여야

6월5일 동서철학회에서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이란 주제로 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이날 김경재 한신대 명예교수의 기조강연이 있었다. 김 교수는 다석 유영모, 함석헌, 김재준 등 종교다원주의의 큰 흐름을 잇고 있는 진보 신학자로 한국 종교계의 거목이다. 그는 이날 강연의 서두에서 '한국사회는 전형적인 종교다원사회'라 전제했다.

종교다원현상은 하나의 종교전통이 다른 전통을 만나는 과정에서 늘상 제기되어 왔던 일이다.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이후 동아시아 전통 내에서 불교와 유교, 도교의 갈등이 빈번히 이루어졌다. 당(唐) 이후 유·불·선 삼교는 동북아의 보편사상으로 안착되었다. 우리의 전통사상으로 유·불·선 삼교가 솥의 세 발처럼 정립된 것도 이들 삼교가 오랫 동안 공존해 온 종교다원현상의 한 모습일 것이다.

근대 이후 기독교의 유입과 동학을 비롯한 신종교의 대두는 안정되었던 종교지형을 또다시 뒤흔들어 놓았고 더 더욱 다원화시켰다. 현재 한국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종교다원적이다.

앨런 레이스(Alan Race)는 종교다원현상에 대한 태도를 크게 배타주의(exclusivsm), 포용주의(inclusivism), 다원주의(pluralism)로 대별했다. 이 가운데 다원주의적 관점은 20세기 후반에 진지하게 제기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종교다원주의의 대표적인 영국 신학자인 존 힉(John Kick, 1922~)은 그의 유명한 저서 〈신(神)은 많은 이름을 가지고 있다(God Has Many Names)〉에서 신은 기독교에서는 '하느님', 유대교에서는 '아도나이', 이슬람에서는 '알라', 힌두교에서는 '라마', 혹은 '크리슈나' 등으로 비록 불리는 이름은 다양하지만 '궁극적 실재'(ultimate reality)는 하나의 신적 실재(divine reality)로 보았다. 힉은 '그리스도 중심'의 신학에서 '신 중심'의 신학으로 전환할 것을 주장하였고, 이를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불렀다. 특정한 역사적 종교의 진리나 창시자를 모든 종교의 중심이라고 볼 때, 타 종교에 대한 우월성을 떨쳐 버릴 수 없게 된다. 역사 속의 모든 종교는 곧 태양이라는 '하나의 신적 실재'를 도는 행성과 같이 각각의 행성이 태양 주위를 돌면서 그 빛을 반사하듯 역사적 종교는 모두 궁극적 실재에 대한 인간의 응답의 결과라는 것이다. 비로소 기독교가 기존의 우월주의(배타주의 혹은 포괄주의)적인 태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이웃종교와 대등한 입장에서 대화할 수 있는 '공동 기반'을 마련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한편 존 힉의 동료이자 화이트헤드의 철학에 영향을 받은 과정신학자 존 캅(John Cobb, 1925~)은 이러한 '신 중심의 다원주의'를 비판하고 '그리스도 중심의 다원주의'를 주장하고 있다.

존 힉이 '궁극적 실재'를 종교 보편성의 공동 기반으로 인정함으로써 다원성을 긍정하여 다원주의의 철학적 기반을 제공하였다면, 존 캅은 오히려 개별 종교 전통의 다양성과 차이성를 중시하는 입장에서 다원주의를 주장한 것이다. 존 캅에게는 궁극적 실재라는 공동 기반이 종교간 대화를 위한 선행조건이라기 보다 대화의 과정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동 기반은 대화를 하는 동안 더욱 확대된다.

존 캅은 이렇듯 '이미 된 존재(Being)'가 아닌 '되어가는 과정(Becoming)'을 중시함으로써 오히려 개별 전통의 다양성을 인정하는 동시에 종교 간에 상호 변혁 가능성을 주장하는 적극적인 다원주의라 할 수 있다.

김경재 교수는 이러한 두 입장을 균형있게 바라보고 있다. 그는 '왜 인류사회에는 다양한 종교가 발생하고 현존하는가?'라는 물음에 대해 첫째 종교인이 찾고 귀의하는 궁극적 실재의 무궁성, 둘째 궁극적 실재를 체험하고 인식하는 인간존재 그 자체의 '삶의 체험'과 '실존 물음'의 다양성, 셋째 모든 '역사적 종교들'은 하나의 '문화현상'이라는 점을 들고 있다. 그의 저서 〈이름없는 하느님〉에서 존 힉의 신 중심 모델로의 사고 전환을 긍정하면서도 그의 모델이 몇 가지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신 중심 모델은 마치 모든 세계 종교가 하나의 신적 실재를 받아들이거나 공통 분모를 전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점이다.

이에대해 존 힉은 하나의 신적 실재란 궁극적 실재의 언표일 뿐 결코 기독교 전통에서 말하는 '인격적 절대자'를 전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비판을 받아들이고 있다.

한편 김 교수는 '종교들의 다양성과 차이를 축복으로 볼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해석학적 눈뜸(開眼)'을 경험한 사람이라야 종교의 다양성이 주는 가치를 제대로 이해수 있다는 것이다. 해석학적 개안이란 모든 종교의 가치체계와 상징체계 역시 일정한 삶의 맥락 속에서 형성된 것으로 그 자체는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으며, 인간의 진리체험도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 절대적인 것을 체험하고 지시하는 것이므로 '역사적 종교'를 '진리자체'와 동일시하려는 유혹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자각을 말한다. 즉 자기 종교 전통에 의지하되 자기 종교 전통에서 얽매이지 않는다고 보았다.

김 교수는 "진정한 종교인들간의 심도 깊은 대화, 협력, 회통은 자기종교에 깊이 귀의하여 자기종교의 정체성을 성실하게 견지하면서도 이웃종교에 열려있어서 자기가 귀의하는 역사적 종교보다 더 큰 진리 앞에 겸손할 줄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만 일어난다"고 말한다.

강연의 마지막에 김 교수는 '동서종교사상의 화합과 회통을 위한 다섯가지 기본테제'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보편적 세계종교들은 모두 결국은 '같다'는 동일성을 강조해서는 안 되며, '차이와 다름'을 축복으로 인식하고, '화이부동'(和而不同)의 정신을 견지하면서 심층에서 만날 때 비로소 '모든 종교들은 서로 통한다(會通)'고 말해야 한다.

▷동서종교간의 대화·협력·회통은 지구촌 문제해결의 방편적 수단으로만이 아니라, 특정한 역사적 종교들이 '창조적으로 변화'하는 모험을 무릅쓰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며, 살아있는 참 종교는 아직도 '형성중에 있는 과정'임을 인지해야 한다.

▷지난 인류문명을 양육해온 세계종교들은 참으로 위대하지만, '진리' 자체는 더 위대하기에 역사적 특정종교를 상대화시키는 '우상타파의 용기'를 지녀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만 절대적인 것을 증언할 수 있다'는 종교체험에서의 역설적 진실에 기초하여, '신앙인의 고백적 사랑의 언어'가 지닌 진지성을 이해하되 독단적 언어로 변질되지 않도록 해석학적 조명등을 항시 비춰주어야 한다.

▷그리스도교는 불교로부터 연기적 실재관과 '비움과 충만의 반대일치' 진리를 배우고, 유교로부터 능산적(能産的, 만물을 생산하는 근원이 되는) 자연주의의 건실함과 천지인 삼재를 회통시키는 성숙한 인본주의 철학의 '우주신인적 영성' 곧 생태주의적 신유학의 비전을 배워야 한다.

▷한국불교와 유교는 현상적으로 드러내는 일부 개신교의 왜곡된 종교현실과 그리스도교 진면목을 구별한다. 그리스도교로부터 '새로움의 창조성'이 지향하는 종교의 구경적 목적은 세계를 '설명'·'이해'·'깨달음'에 있지 않다. 세계를 '변화'시켜서 만인과 만물이 소외되지 않는 '건강한 생명세계'의 실현에 있음을 다시 한 번 자각해야 한다.

김 교수가 제시하고 있듯이 '모든 종교는 하나다'라는 동일성만이 아닌 '모든 종교는 다르다'는 종교 간의 다양성을 축복으로 받아들이되 각기 다른 종교 전통에 머물러 교단주의에 빠져버리지 않도록 '해석학적 개안'이 필요하다.

결국 개개인의 신앙 고백(체험, 깨달음)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며, 이를 서로 존중해 줄 수 있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각각 상대방도 궁극적 실재를 향하는 다른 모습이라고 인정하면서도 다른 종교 전통에 대하여 무관심해지거나 상대주의적인 태도에 머물러 진정한 대화를 외면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종교 전통에 충실히 하면서도 자기 전통에 매몰되지 않는 태도가 중요하다. 그것은 종교가 고정된 궁극적 실재에 바탕한 완성된 실재가 아닌 '과정 속에 있는 종교(religion in process)'라는 자각에서 온다. 김 교수는 "만약 고정되고 완결된 종교라면 역동성 없는 죽은 종교요, 문화유산적 관광자원으로서의 화석화된 종교일 뿐"이라고 역설한다.

김 교수는 성경의 말씀을 '신앙인의 고백적 사랑의 언어'로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거기에 머물러 버린다면 곧 교단주의 혹은 교조주의에 얽매여 자기 종교 전통에만 매몰되고 만다.

종교다원주의는 소박하게는 각 종교 전통마다 가지는 신앙의 고백에 대하여 진지하게 경청할 줄 아는 태도에서부터 시작하여 적극적으로는 새로운 기독교, 새로운 불교, 그리고 새로운 원불교로 나아가려는 창조적인 변혁의 노력을 통해서 진정한 대화의 의의가 나타날 것이다.

조선불교의 혁신을 주장했던 소태산대종사의 정신이 아마도 끊임없는 자기 변혁의 가능성마저도 열어놓았고 모든 종교의 교지(敎旨)도 이를 통합 활용하여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자고 한 점에서 김 교수의 종교다원주의적 관점은 깊이 경청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는 결코 원불교만의 종교가 아닌 새시대 새종교인의 모습으로 모든 종교인들이 거듭나기를 바라는 대종사의 염원이 함께 담겨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제불제성의 본의를 더욱 드러내 주신 것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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