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일념을 온전한 생각으로 그치라

정일성이 여쭈었다. "일생을 마칠 때, 최후의 일념을 어떻게 하오리까?" 대종사 답하시기를 "온전한 생각으로 그치라"하셨다. 사람이 일생을 살아가는데 다른 무엇보다도 최후의 일념을 잘 챙겨가는 것이 가장 큰 복이 된다고 하신 이유는 그것이 바로 내생의 제일 종자가 되어 그대로 움이 트고 발현이 되기 때문이다.

앞의 장에서는 최후에 이르러 착심을 놓고 더욱 청정일념을 챙기라는 내용의 말씀을 하셨는데, 이 장에서는 '온전한 생각으로 그치라'는 표현을 하셨다.

우리의 성품자리는 본래 크게 온전한 것이다. 성품의 영령한 면을 가리키는 '정신'은 정밀하고 싱그러우며, 한 생각이 청정하고 온전한 것으로, 본래 우리 모두에게 천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원래 온전하고 밝은 우리의 '정신'은 욕심의 경계를 따라 천지만엽으로 흩어져서 그 온전함을 잃어버리고 지혜의 광명이 어두워지게 된 것이다.

'온전한 생각으로 그치라'하심은 본래의 온전하고 밝은 '정신'을 챙긴 상태에 머물러 있으라는 말씀이다. 한 생을 마무리하는 최후에는 그 일념을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 적적성성한 자리, 공적하면서도 영지한 그 자리에 두라는 말씀이다.

그러나 평소의 단련이 없이 일생을 마치는 그 순간에 '온전한 생각'을 챙김이 가능할까?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평소에 염불이나 주송, 좌선, 기도 등을 통하여 온전함을 지키는 공부를 단련하지 않으면 어려운 것이다.

죽었다 다시 태어나는 경로가 '마치 잠자고 깨는 것과 같다. 분별없이 자버렸으니 내가 어디로 간 것 같지만 잠을 깨면 어디선지 정일성이가 다시 나온다. 설사 분별 주착으로 가도 정일성이가 없어지지 않는다. 개 속으로 가도 정일성이요, 돼지 속으로 가도 정일성이다. 똥 속에도 그 현묘한 놈이 들었고 마른 나뭇잎 속에도 현묘한 놈이 들었다. 이놈이 안들어 있는데가 없다. 이놈이 들어서 사람도 살리고 과실도 열고, 한 가지가 천변만화를 베풀며 조화를 내고 다닌다. 이것이 불성(佛性)이다'고 하셨다.

부처님이라 해서 더 밝을 것이 없고 중생이라 해서 더 어둘 것이 없는 크고 온전하면서도 영령한 그 자리를 누구나 가지고 있으나 다만 범부 중생은 그 영지가 경계를 대하매 습관과 업력에 끌려서 결국 육도윤회의 수레바퀴에 휘말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산종사께서는 세상에서 아무리 부자요 권리가 있던 사람이라도 갈 때에 자성보물을 도둑맞고 가면 천하에 그것같이 슬픈 일이 없다고 하셨다.

<성지송학중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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