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민구 교무부장 성지송학중
쪽에서 뽑아낸 푸른 물감이 쪽보다 더 푸르다는 뜻으로, 제자나 후배가 스승이나 선배보다 나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순자(荀子)의 권학편(勸學篇)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 학교와 바로 이웃하고 있는 집이 한 채가 있다. 그곳에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노후를 함께 보내는데 할아버지께서 건강이 좋지 않아 병석에 누워계신다. 그러다 보니 할머니께서 집안일과 병수발 그리고 농사일까지 모두 돌보고 계신다.

가끔 학교 앞을 지나는 모습을 봤지만, 특별히 인사를 건네지 못하고 멍하니 뒷모습을 쫓아가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읍내 장터에 다녀오는지 두 손 무겁게 물건을 들고 오는 모습을 보게 되어 인사를 건네며 짐을 들어드리려 했다.

'안녕하세요. 할머니. 짐 좀 들어드릴까요?'
'아이구. 총각 고맙네. 근데 어디 살어?'
'네. 여기 학교에 살아요'
'음. 그럼 선상님이시네. 에구 선상님이 뭐 이런 걸.'

너무도 부끄러웠다. 별로 도와드린 것도 없고 그냥 지나던 길에 잠깐 들어준 것 뿐인데 말이다. 이를 계기로 할머니와 지나며 인사를 주고받고 안부를 묻는 정도가 됐다. 그렇게 얼마간 시간이 흘러 가을이 되니 할머니 마당에 너무도 탐스런 감이 익어가고 있었다.

여느 할머니도 그러겠지만 세월 따라 굽어진 허리와 쇠약해진 기운 탓에 높은 곳에 감은 딸 엄두도 내지 못하셨다. 어느 날 운동장을 가로질러 오시는 할머니를 뵙고 무슨 일로 그러시는지 여쭤보니 감 좀 따게 학생 좀 보내줄 수 있는지 부탁하러 오신 것이다. 그 길로 내가 맡은 학생 중 키 크고 힘 좋은 녀석과 함께 할머니네 감나무를 앙상하게 만들었다. 까치를 위한 감을 남겨놓고 돌아오려는데 할머니는 옛날 장바구니에 맛나게 생긴 감만 추려서 연신 고맙다며 챙겨주려 하셨다.

몇 번 거절했지만 손주 같아 주는 것이라 어찌할 수 없이 받아왔다. 감이 얼마나 맛나고 기분이 좋던지 감 따는 게 재밌기도 했고, 내가 도와드릴 수 있는 것에 할머님께 더 감사했다. 그 이후로 난 두어 번 더 농사일을 도와주고 1년여를 보냈다.

그런데 올해 여름 할머니께서 양파농사를 지으셨다면서 까만 봉투에 씨알이 굵은 녀석들만 모아 들고 오셨다. 농사일을 도와드리지 못한 마음에 너무 미안해 순간 얼굴이 빨개지기 시작했다. 이럴 때 쥐구멍을 찾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는데, 기분좋은 이야기를 할머니로부터 들을 수 있었다.

작년에 나와 함께 한 키 크고 힘 좋은 녀석이 나도 모르게 꾸준히 농사일을 도와줬던 것이다. 고추밭에 농약하는 데 줄 잡아주기, 고추 넘어지지 않게 지지대 세워주기, 농사 후에 비닐 걷어주기, 퇴비 옮겨주기 등 녀석은 주말과 방과 후에 묵묵히 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혼자서 힘들 때는 친구들과 함께 가서 할머니의 가려운 곳을 시원스레 긁어줬던 것이다. 정말 제자가 스승보다 낫다는 말이 절로 나오고 이런 모습이 "청출어람"이 아닌가 싶다.

가끔 이렇게 얘기한다. 대안학교는 아이들과 함께 부대끼며 서로 배우고 가르치며 살아가야 하는 공동체라고 말한다. 이번에 난 우리 학생으로부터 큰 가르침을 배웠고 멈춰있는 양심보다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함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됐다. 08학번 3학년들아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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