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곳 마다 교화 꽃 피워 법풍 진작

▲ 이성신 원로교무(왼쪽)와 김법은 교무.
원기56년 3월 총회, 교화 3대 목표 운동 종합시상식에서 종합 1등, 연원교당 불리기 종합 1등, 개인 연원 달기 특등을 차지하며 광주교당의 교화력을 알렸던 성타원 이성신(88) 원로교무. 교화 현장에서 법풍을 불리며 교단의 많은 인재를 배출한 이 원로교무를 6일 중앙여자수도원 운봉분원에서 만났다. 이 자리에는 전북교구 인월교당·인월경애원 원장인 김법은(52)교무가 함께 했다. '대종사를 친견한 이야기와 교당에서 교화한 일화'를 중심으로 대화를 나눴다.

- 출가 후 30여 년이 지났지만 법력 증진이 더딥니다. 현장이 바쁘니까 심신이 더 피곤하고 적공하는 시간이 부족한 측면이 있습니다. 법력이 방전되지 않고 진급하기 위해서는 어떤 공부를 해야 할까요?

법력이란 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하나 하나 행동에서 나오는 것이다. 광주교당에서 근무할 때에는 여름 2달간은 순교를 하지 않았다. 무등산 난쟁이 집에서 된장, 간장을 갖다놓고 2달간 꼭 적공했다. 경을 읽고 좌선을 하고, 교도들 가정을 위한 기도를 하면서 여름 한 철을 났다. 이렇게 하게 된 계기는 여름에 순교를 하다보면 더워서 교도들이 집안에서는 옷을 벗고 산다. 이런 상황을 당하고 보니 '여름에는 순교를 절대로 가지 마라'가 철칙이 되었다. 매주 법회는 정기적으로 보되 법회 후에는 더위도 피할 겸해서 산에 들어가 적공한 것이다. 교화자들이 현장에 있다 보면 지치고 힘들 때가 많다. 육체적으로 힘든 면도 있지만 내면의 영적인 에너지 고갈로 힘들어 한다. 자기를 돌아 볼 수 있는 자신만의 절대적인 시간을 가져야 하고, 특별한 적공도 요구된다.

- 대종사께서 특별히 내리신 법문은 무엇입니까?

"성신이는 중국 광동에서 스님을 하다가 왔다. 그런데 왜 여자로 태어났느냐 하면 우리 회상은 여자 남자가 평등한 회상으로 여자가 되어야 한다. 전생에 스님 노릇을 하면서 헛 밥은 안 먹은 듯하다. 너는 인연이 많고 복도 많으니 산꼭대기에 올려 놓아도 잘 살 사람이다. 성신이는 솜씨는 없지만 음성이 좋다"고 칭찬했다. 대종사께서는 "부처님 당시에 태어나도 부처님 법을 그대로 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부처님 후에 나왔더라도 부처님 법을 잘 따르고, 신심 굳게 공부 잘하면 부처님 당시에 들어 온 사람보다 더 낫다. 늦게 왔다고 실망하지 말고, 무시하지 말고, 일찍 왔다고 자만하지 말라"고 자주 강조했다.

- 대종사께서 특별히 강조한 공부법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유머를 많이 활용하셨다고 들었는데 평소 총부생활에서는 어떠했는지요?

내 기억으로 대종사께서 훈련법 중 강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훈련시켰다. 강연을 직접 듣고는 강연자의 성음, 언체, 조리, 강령을 중심으로 평가해 그 자리에서 발표하며 바로잡아 줬다. 강연의 내용이 다른 곳으로 흐르면 초인종을 꼭 눌러 주의를 환기시키기도 했다.

대종사께서는 대중을 거느리실 때 꾸중도 많이 했다. 유머도 즐길 줄 알았다. 총부에 여자들은 박창기 선진이 가르쳤는데 어느 날 대종사께서 지나가다가 여학생들이 공부는 안하고 까르르 웃는 소리가 심하게 나는 것을 듣고는 여학생들을 조실로 불렀다. 대종사께서 남자 선생이 강의하니 여자 얘들이 웃는다고 생각했다. 여학생들을 혼을 낼 요량으로 자초지종을 물은 것이다. 그래서 수업 중에 들은 유머를 말했다. '동해 바다 가자미가 서해 바다 멸치한테 꿈을 해몽하러 갔는데 그 꿈이 가자미가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졌다가 금에 몸이 닿았다가 꽃밭에 들어갔다가 공해로 넘었다는 것이다. 서해 바다 멸치가 꿈을 해몽하길 하늘로 올라갔다가 땅에 떨어졌다는 것은 낚시줄에 걸렸다는 것이고 금에 몸이 닿았다는 것은 칼질, 꽃밭은 화로불, 공해로 넘어갔다는 것은 사람 입으로 들어갈 팔자라는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창기'는 어디서 이렇게 우스운 소리를 듣고 왔는고. 매우 재미있어 했다.

- 가는 곳마다 교화에 새 바람을 일으키며 교당 창립은 물론 교화 활성화에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광주교당에서의 교화는 많은 인재 발굴과 함께 초창기 교단에 활력을 불어 넣었습니다. 광주교당 교화에 특별한 인연이 있다면?

참 이상한 일이다. 아마 전생의 인연인가 싶다. 광주교당에 있을 때 잘 모르는 사람이 교당에 찾아와 노인이 아프니까 목탁을 치며 기도해 줬으면 한다는 연락을 받았다. 나는 그곳이 어디인 줄 모르고 그 집을 찾아 할머니가 빨리 쾌유하도록 정성껏 기도 올렸다. 한 번 다녀간 뒤 매일 와서 독경을 해 달라고 부탁하더라. 나중에 알고 보니 조흥은행장 어머니였다. 할머니가 열반한 후 '집에서 초상을 치루지 말고 원불교 교당에 가서 하라'는 유언 때문에 교당에서 발인식과 천도재를 지냈다. 이 발인식을 계기로 조흥은행장이 원불교를 좋아하며 입교하자 지역유지들 교화가 절로 살아났다.

- 인월지역을 비롯 농촌지역이 급격한 인구 감소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이 줄어들고 있습니다. 농촌교화와 도시교화를 다 경험해 본 것으로 알고 있는데 어떻게 교화하셨는지요?

나는 농촌에 살던 대도시에 살던 꼭 지역사회의 일을 했다. 대구교당에 있을 때에도 검사 판사 교도가 있어도 이 분들과 함께 농촌봉사활동을 전개해 갔다. 광주교당에 있을 때는 전남도청과 연계해 도서지역 어린이들을 초청, 도시문화를 체험하게 지원했다. 구두 닦는 사람들을 위한 초청행사도 꾸준히 진행했다. 농촌교당에 있을 때는 교리강습회가 있거나 특별한 때에는 호미나 바구니 등 논밭에서 필요한 도구를 장만해 교당에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선물했다. 대중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는 교화는 시골 인심을 얻는데 매우 유용하게 작용한다. 교무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교도들에게 미리 준비를 하게 하는 동시에 교도들에게 역할을 하나씩 줬다. 그 역할에 책임감을 갖고 교화에 합력하니 교도들도 흥이 나더라. 내가 순교를 다닐 때는 미음을 끓여 주전자에 담아가지고 다녔다. 방문을 할 때는 식사 시간을 피해 다니면서 배고프면 미음 주전자를 마셨다. 교도들 가정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지 않도록 세심하게 살핀 것이다.

- 가문에서 많은 출가자들을 배출했습니다. 대종사님과의 어떤 인연으로 초창기 교단에 참여하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우리 집안은 함평 이씨로 영광군 묘량면 신흥리에 터전을 잡고 살아왔다. 일산 이재철 선진이 나에게 당숙이 된다. 일산 선진은 모시 두루마기를 입고 영광군청을 출입하며 여러 가지 일을 보았다.

어느 날 군청을 출입하다가 길룡리에 이인이 났는데 굉장하다는 군청 직원의 이야기를 듣고 그 길로 길룡리를 찾게 된다. 처음 대종사를 뵈니 쳐다보지도 못했다고 한다. 대종사 보다 나이 많은 일산 당숙이었지만 외모와 눈초리에 머리가 저절로 숙여졌다고 하더라. 이런 일산 당숙은 신흥에서 영산으로 왕래가 잦았다. 내 아버지(도산 이동안 선진)와 이 얘기 저 얘기 나누더니 영산으로 데리고 가 버렸다. 그 다음에 응산 이완철 선진, 고산 이운권 선진도 영산으로 소리 없이 떠나자 할아버지가 노발대발 했다. 그렇게 신흥에서 나온 출가자만 60여명이 된다. 아버지는 신흥리 터를 오리터라고 하면서 지리적 특성상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안되고 날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많은 가족들이 영산으로 익산 총부로, 수계리로 떠나 원불교 회상에 정착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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