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대종사 법통 이은 수행 현장

▲ 구간도실 터.
▲ 정산종사 토굴 터.
정산종사는 유시 이래 도를 구하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도(道)를 공부하던 처가댁 친척인 여처사를 통해 당시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이 많이 거처하고 있던 가야산에서 증산교인을 만나 태을주(太乙呪)를 배우고 공부를 하였지만 만족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도를 공부하던 사람들로부터 큰 도를 성취하려면 상도에 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행장을 꾸려 나이 열여덟에 별의 고장, 고향 성주 땅을 나선다.

상도로 온 정산종사가 원평에서 만난 인연이 송적벽 선진이다. 이를 인연으로 하여 증산의 열반 이후로 증산교 일파 중에 가장 큰 세력이었던 보천교 교주 월곡 차경석을 만나고자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하여 선돌부인과(立石)과 고부인 등을 만나게 된다. 이후 1917년 정읍 객망리(현 덕천 신송마을) 강증산의 생가에서 강증산의 딸 강순임을 통해 〈정심요결(수심정경)〉을 입수하게 된다.

당시 정산종사가 받았던 〈정심요결〉은 북창선생의 〈용호결〉과 함께 선가의 경전으로 전해지던 책으로서 본래 이름은 〈영보국정정지련〉이라고 전해진다. 이후 정산종사는 선돌부인인 강순임과 석 달 동안 함께 기도를 하고, 다시 증산의 고향 손바래기로 가 수도를 계속하게 된다.

〈정심요결〉과 교단과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일목요연하게 확언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지만 박용덕 교무에 의해 공개된 정심요결의 내용이 '영보국정정편'과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심요결〉의 내용이 〈원불교 교고총간〉 4권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고 〈정산종사 법어〉경의편 65장에 외수양과 내수양, 66장에 외정정과 내정정 내용으로 함께 실려 있다.

이후 정산종사는 진묵대사가 수도했고, 강증산 선생께서 두승산 시회에서 어떤 노인에게 받은 비서(秘書)를 지니고 적공을 한지 5개월 만에 도를 이루었다는 전주 모악산 대원사에 3개월을 머물면서 적공을 했다. 당시 전주 대원사에는 강증산 열반 10년이 되는 해로, 증산의 재림을 기다리던 종도들이 모여 자연스럽게 정산종사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그때 대원사에 불공을 다녔던 정읍 화해리 김해운은 본가로 정산종사를 모시기를 간청하여 거처를 화해리로 옮기게 된다. 정읍 화해리에 머물면서 정산종사는 정산종사 법문과 일화에 등장하는 많은 이적을 나투게 된다.

그해 28세의 청년 대종사는 제자들과 더불어 간척사업을 벌이던 시기였으며 때때로 천문을 관찰하시며 중앙에 임할 기연의 위치를 찾으셨다고 한다. 회상을 이룰 중추의 인물이 가까운 정읍에 오신 것을 관하신 소태산대종사께서 팔산 김광선 선진과 더불어 영광 땅에서 정읍 화해리로 찾아간 것이 무오년의 화해제우의 역사적 사건이었다.

이때 정산종사는 18세의 어린 나이었으나 소태산대종사와 정산종사는 형제지의를 맺었다고 한다. 정산종사의 불법연구회 입회일은 원명부 기록으로는 원기3년 8월에 입교를 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정산종사는 당시 이때를 법어 기연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나는 8, 9세 때부터 보통 인간의 길을 벗어나 모든 것을 다 알고 살 수는 없는 것인가 하고 마음 고통이 심하여, 집을 뛰쳐나와 이인(異人)을 찾기도 하고 혹은 하늘에 축원도 하여 9년간을 여기저기 방황하다가, 다행히 대종사를 뵌 그날부터 그 모든 고통이 일소됐다." 도를 구하러 고향땅을 떠난 소년이 드디어 소태산대종사를 만나 구세경륜을 구현할 스승을 만나게 된 것이다.

후일을 기약하고 헤어진 정산종사는 몇 달이 흘러 영산을 찾게 되는데 후일에 감회를 말씀하기를 원만한 용모의 스승님 모습이 대종사님 모습이었으며 해안가 풍경이 바로 영산의 풍경이었다고 술회했다.

이때 정읍 화해에서 영산을 찾아온 정산종사를 두고 소태산대종사는 제자들에게 "이제 우리가 그토록 기다려 만나려던 사람이 왔으니 우리 회상 창립의 일이 반이나 이루어진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선언했다.

이 때는 방언공사의 진척이 많이 이루어진 때였다. 당시 일제 치하에 어려운 상황에서 외지인 경상도에서 낯선 사람이 방문을 한다는 것 자체가 남의 이목을 끌만한 일이었고 일제의 감시가 그리 녹록치 않았던 시절이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소태산대종사는 영산 방언공사에 정산종사를 참여시키지 않고 당시 불법연구회 최초의 건물인 도실 뒤편에 토굴을 파고 증산교 수련을 통해 통령한 도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정산종사의 영대를 갈무리하기 위해 토굴 수련을 명하셨다고 한다. 앞으로 미래 시대는 인도상 요법의 시대가 불법의 대의임을 예시하신 소태산대종사는 신통묘술로는 인도상 요법을 구현할 수 없었기에 증산교 일파의 수련을 통해 일찍이 통령한 도인이라는 소리를 듣던 정산종사에게 토굴 수련을 명하신 것이다.

원기8년에 소태산대종사 모친상을 계기로 구간도실이 현재 위치로 옮겨가고 난 뒤에 최초의 교당 터는 자연 쇠락의 길을 걸었다. 소태산대종사의 상수제자였던 정산종사의 수도 흔적이었던 토굴 터도 희미해져 버렸다.

이후 원기84년에 박은국 원로교무가 영산을 방문하여 당시 선진들로부터 들었던 정산종사 토굴 터의 위치를 알려주어 토굴 터의 위치에 돌을 포개 위치를 표시하여 놓았다.

세월이 흘렀으나 초기 회상을 일구었던 정신적 문화 현장들이 후진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있을 무렵 소태산대종사의 법통을 이은 정산종사의 초기 수행의 현장이었던 구간도실 토굴 터는 옥녀의 치맛자락을 두르던 토사에 묻혀 버렸다.

< 영산사무소>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