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장수(長水)군 장안(長安)의
산마루에 섰습니다.

아침 안개가 걷히면
저 멀리 지리의 천왕봉과 반야봉을 잇는 산줄기가
눈앞으로 다가와 품에 안깁니다.

지난 계절 폭염과 폭풍우 속에 가슴에 품었던 열정이
위로 솟구쳐 하얀 그리움이 되었습니다.

서쪽으로 기울던 해의 잔광도 사그라지는 어스름에
억새가 바람에 흔들립니다.
어서 가라고, 따라 내려가라고 손짓합니다.

뿌리에 갈무리 했던 한 방울의 물은
아래 샘물과 함께 실낱같은 물줄기가 되어 흘렀습니다.

바위를 깎아낸 작은 모래알갱이를 나르고,
지지(知止)계곡을 따라 흐르며 조약돌도 굴렸습니다.

그리하여 섬진강은 지리산 서편을 돌아
내리 남쪽으로 흘러 광양만 남해로 합했습니다.

우리는 믿습니다.
풀잎 하나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우주의 운행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는 것을,

갈참나무 가지로 뛰어오르는 다람쥐 한 마리가
부처님과 동행하고 있다는 것을,

빗방울 하나가 수분령에 떨어지면서 바로
먼 남해바다와 하나라는 것을,

높음도 낮음도, 붙잡을 것도 갈망할 것도 없이
아래로 아래로 내려가면 된다는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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