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교무는 나에게 "일체의 분별심이 망념임을 깨치는 공부를 하려면 염불과 좌선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염불을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니 먼저 마음을 청정하게 일심을 모은 후 염불을 하는데 염불하는 소리를 꼭 들으면서 하라고 이야기 한다.

입으로만 하면 입정이 활성화가 되지 않아 아무 효과가 없다고 한다. 나의 염불소리를 당처가 들으면서 소리를 듣는 나와 염불하는 내가 하나가 되어 입정이 드러나고 소리의 청정함을 얻어 그렇게 한다면 수가 있다고 한다.

'그래 한번 해보자!' 나는 평소 출퇴근 시간에 라디오를 듣고 도로 주변 산과 들의 아름다운 풍경들을 보는 재미로 운전을 했었는데 이제는 귀와 눈으로 들어오는 달콤한 유혹을 뿌리치고 오직 수양에 매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운전대를 잡고 나는 염불을 하기 시작했다. 염불을 하다보면 어느새 나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참 신기했다 눈물을 흘리고 나면 그렇게 몸과 마음이 가벼워졌다. 계속되는 염불을 통하여 내안의 깊고 깊은 서럽고 한스러운 감정으로 들어갈 수 있었고 빼곡하게 박힌 어둠의 파편들이 울음에 섞여 녹아내릴 때마다 나는 점점 맑아지는 염불 입정의 신비로운 힘 속으로 빨려 들었다.

그것은 불임의 여인이 아들을 소원하면서 보름달의 기운을 빨아들이는 흡월정의 성스럽고 간절한 것이었고 염불 속에 녹아드는 나의 아픔들은 신기루처럼 나타났다 사라지는 환영 같은 것이었다.

나는 무상한 환영 속에 붙들려 고단하고 괴로운 삶에 빠져 허우적대는 가여운 중생이었다. 친구 교무에게 "망념임을 어떻게 해야 깨치는 것이냐"고 물었다.

친구 교무는 "경계에 휘둘렸던 마음을 그대로 바라보라"고 한다. 바라본다는 것에 대한 개념 정립이 안돼 막막했다.

친구교무는 경계에 따라 일어나는 감정을 눈을 깜빡이지 말고 뚫어지게 쳐다보라고 주문한다. 답답했다. 염불을 하면서 올라오는 감정이 염불을 계속하면 없어지기는 하는 것 같은데 뻥 뚫렸다는 맛이 없다. 번뇌를 바라볼 때의 나의 생각은 어떻게 되는 건지 다시 물었다.

생각을 놓고 적적성성한 마음이 되어서 바라보아야 한다고 더 구체적인 힌트를 준다. '아, 이제 감 잡았다. 좌선할 때의 느낌인 적적성성한 마음으로 번뇌를 바라보면 되는구나!'

아들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들어온 어느 날 나는 이 불신에 대한 마음을 가지고 들여다 보아야겠다고 결심했다. 망념임을 깨치기 전에 일어서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 불신의 마음을 적적성성한 마음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10분 정도를 바라보니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아들에 대한 불신의 마음이 봄눈 녹듯 어디로 가버리고 마음이 평온해져왔다. 평온해진 마음이 신기해서 그 마음으로 다른 경계들을 떠올려 본다. 아무 분별이 없고 감사한 마음이 차오른다.

아파트 현관문에 붙여진 교회부흥회를 알리는 책자를 보니 갑자기 교회에 대한 분노가 치솟았다. 아까의 그 마음으로 다시 화난 마음을 바라보려는 찰나 갑자기 맥이 풀리면서 내가 흐느끼며 운다.

교회에 대한 반감이 녹는 울음 '아! 바로 이거였구나! 망념임을 자각하는 것은 바로 이거였구나!' 번민의 노예가 되어 힘들게 살았던 서럽고 아팠던 내가 한없이 울었다.

'아! 나는 이제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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