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 기독교 수도인이었던 '안토니'의 전기를 쓴 아타나시우스 주교의 표현에 의하면 그는 악마와 투쟁하면서 어떤 유혹에서도 해방되는 영적 순결성에 도달했다고 한다. 기독교에 있어 악이란 '본래 하나님이 정당하게 만들었으나 잘못 놓여있음으로서 악이 된다'는 논리가 전개되며,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사탄과도 같은 것으로 거론되었다.

선과 악에 대하여 동양에서 특히 관심을 보인 유교의 맹자와 순자가 있는데 순자는 인간의 성악설을 피력하고 있으며, 고자는 성품은 선도 악도 없다고 하였다. 불교에서는 신구의 삼업(三業)으로 짓는 죄악을 밝히며 무명의 업보를 벗어나라고 강조한다. 〈법구경〉 183게에 의하면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衆善奉行)을 거론하고 있다. 불타는 십악(十惡)을 밝히어 살생·도적·간음·망어·기어·양설·악구·탐심·진심·치심을 멀리하라(〈사십이장경〉 4장)고 하였다.

원불교 초기교단에서는 선악의 문제를 매우 중시하여 이를 강연이나 회화의 주제로 삼았다. 원기14년 2월26일 중앙총부 예횟날, 45명이 법회에 참석하였는데, 이날 강연에 세분의 연사가 등장한다. 정산종사의 대선(大善)과 소선(小善), 송만경의 대악(大惡)과 소악(小惡), 전음광의 대덕과 소덕이란 주제로 열띤 강연을 하였다.

송만경 교무의 연제 '대악과 소악'이 본 문목과 관련되어 있다. 그러니까 원기12년 〈수양연구요론〉이라는 초기교서를 발간한 후 불법연구회에서는 관련 문목을 강연으로 연마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사람의 성품이 동한즉 능히 선하고 능히 악하다(성리품 2장)는 대종사의 법어와 상통하는 것이다.

문제는 악에 대소가 있다는 뜻을 어떻게 이해하느냐이다. 악이란 모두 악이지 거기에 대와 소가 있다는 것은 이해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선(善)에 대소가 있다는 바로 이전의 문목과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곧 능선능악을 이해하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자는 뜻이다. 의미론적으로 대종사가이 밝힌 '능선능악 무선무악'에 있어 능악과 무악은 악마저 자유로 초월할 수 있는 지극한 상황에 관련되므로 대(大)에 해당한다면, 이에 대해 구애되는 상대적인 악은 소(小)에 해당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론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대악(大惡)을 긍정하고 소악(小惡)을 부정하는 듯한 인상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선의 대소를 이해하는 것과 달리 악의 대소는 다르게 이해해야 한다. 곧 업보 윤회를 벗어나지 못할 극악무도(極惡無道)한 것이 대악이라는 점을 인지하자는 것이다. 이에 한 마음이 악하면 모든 악이 이에 따라 일어남을 알고, 또 성품을 깨치지 못한 사람이 악을 행하면 모든 것이 악이 됨을 알아서 삼업(三業) 청정의 반야지혜를 밝힘으로써 대소의 악행을 벗어나야 한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