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감정을 바라봄과 동시에 순식간에 사라지는 체험을 하고 난 뒤 나는 경계가 있을 때마다 일어나는 마음을 관조하는 일에 몰두했다.

가벼운 경계는 그 자리에서 관조를 하면 사라지는데 아픔이 깊은 것은 관조가 잘 안되고 감정에 끌려 다녔다.

마음공부의 습관이 들어 올라오는 감정을 나의 생각으로 몰고 가려는 나와 그것에 끌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또 다른 내가 맹렬히 싸우고 있었다.

자꾸 감정에 끌려 다니는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친구교무에게 다시 물었다. 친구 교무가 바라보는 입정의 힘이 약하니까 그렇다고 하면서 감정에 끌리지 않으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면서 관조하라고 한다.

젊은 과부가 되어 미국에서 홀로 아이 셋을 키우면서 공부하고 있는 새언니의 한국 가족에 대한 원망의 소리를 엄마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새언니의 고통보다는 평생을 한숨과 눈물로 살아온 엄마가 받고 있는 고통이 너무 아팠다.

새언니에 대한 원망의 마음을 놓고 들여다보는 순간 언니에 대한 미움이 순식간에 사라지고 좌선할 때의 적적성성한 기운이 쫙 올라왔다. 엄마의 아픔을 내 아픔처럼 알고 살아왔던 지난날의 상처가 되살아나 눈물이 흘렀다. 오빠가 죽기 전까지 단 한 번도 행복감을 느껴보지 못했던 나, 감정을 억압하고 억압하여 목석처럼 살아야 했던 내가 서글퍼 울었다.

이제 나는 관조로써 깨쳐 얻고 올라오는 묵은 업장을 녹여내면 되었다. 공부를 시작하자마자 올라오는 수많은 경계들이 나에게 쓰나미가 되어 덮쳤다. 순식간에 몰려오는 무명이라는 이름으로 되살아 갖가지의 형태로 나타나 나를 엄습했다.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실성하던지 살던지의 기로에서 나는 살고 싶어서 미친듯이 염불하고 미친듯이 좌선에 열중했다.

'완벽'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완벽 그 자체였다. 그리고 나는 완벽한 존재였다. 입정만 여의지 않으면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존재가 나를 평화의 세상으로 데려간다. 내가 상상으로 만들어 놓은 나에 대한 생각들은 모조리 허구의 세상이었다. 내가 만든 상상놀이였다.

그것이 무명에서 시작된 것이었으므로 나는 내안에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얼룩져 있는 원망, 죄의식, 미움, 분노, 두려움, 적개심, 살심, 질투심, 절망, 슬픔, 외로움 등 내안에 살아있는 부정적인 관념의 언어들을 자성의 혜광으로 모조리 지워낼 수가 있었다.

'색즉시공' '번뇌 즉 보리'라는 불교의 관념적용어가 체험으로 내안으로 살아 들어왔다. 그리고 참회문의 문구 '업은 본래 무명인지라 자성의 혜광을 따라 반드시 없어지나니'와 '전심작악은 구름이 해를 가린 것과 같고 후심기선은 밝은 불이 어둠을 파함과 같나니라' 또한 '이참이라 함은 원래 죄성이 공한 자리를 깨쳐 안으로 모든 번뇌망상을 제거해 감'에서의 의미가 정확하게 체험으로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대종사님이 그렇게 감사할 수가 없었다. 파란고해의 일체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으로 개교의 동기에 밝혔듯 좌선 염불한번 제대로 안 해 보던 사람이 좌선 염불로 고통에서 해방되게 만들어 주었으니 이 얼마나 감사하고 감사할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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