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종교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그냥 착하게 살면 되지 꼭 종교를 믿어야만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루는 감리교 김신원 목사님 내외를 만난 것이 인연이 돼 교회를 다니게 됐다. 하지만 교회를 다니는 게 썩 내키지 않아 2년 정도 다니다 나의 종교생활은 정리가 됐다.

1984년이었을까. 한국으로 휴가를 다녀오게 됐다. 외국생활인지라 한국 서적을 구하기가 어려워 서점에 들렀다. 나도 모르게 발길은 불교 코너를 찾고 있었고 불교에 관련한 책을 구입했다.

독일로 돌아와 시간이 있을 때마다 불교 도서를 봤고, 경전 말씀을 통해 인간의 불생불멸과 인과보응되는 이치가 어렴풋이 다가왔다. '이곳에도 불교가 있으면 한 번 다녀볼 것인데'라는 마음이 생겼고, 나도 모르는 가운데 불법에 대한 신앙심이 간절해져 "나무아미타불"을 주야로 염송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 가까운 형님으로 지내던 신태문이 프랑크푸르트에 원불교 교무님이 오셨는데 한 번 만나뵙지 않겠느냐 했다. 이때 난 원불교를 들어보지도 못했지만, 만나 뵙고 싶다고 청을 했다. 그로부터 2~3주가 지났을까. 그 형님은 교무님이 한국으로 들어가셨다고 말했고, 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마음을 접고 살았다.

그리고 몇 해가 지났을까. 원기73년 가을 어느 날 최성덕 교무님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한 번 뵙기를 원했다.

그해 가을 서울대 물리학 교환교수인 김성주 박사님 집에서 최성덕 교무님의 가족과 몇 교도님을 초청하는 자리에 나도 가게 돼 그때 처음으로 최성덕 교무님을 뵙게 됐고 그 주 법회를 봤다.

우리 모두는 〈원불교 교전〉을 받아 집으로 돌아왔다. 전서를 읽으며 불교 경전을 읽었을 때 느낀 감정으로 법문이 새롭고 마음을 기쁘게 하여 몇 번을 읽고 또 읽었다. 처처불상 사사불공, 무시선 무처선의 가슴설레는 표어와 일체 모든 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이 개교의 동기라 하신 말씀이 가슴에 크게 와 닿았다. 이 때부터 원불교에 입교해 종교생활이 시작됐는데 이때 나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주위 친구들과 아내는 천주교를 다녔고, 어린 남매는 천주교 세례를 다 받아 대부 대모를 정하여 형제같이 지내는 때라 가족들의 반대는 심했다.

아내가 적극적으로 반대해 교당을 다녀오는 날이면 가정 불화가 일어났으며 그때마다 아내에게 함께 다니자고 권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아내는 천주교 신앙을 한지 오래되었기에 우린 종교의 자유를 인정하자고 말했다. 교당을 다녀오거나 교무님의 말씀을 듣노라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다른 종교는 귀에 들어오지 않고 오직 대종사님 법문과 선진님들의 이야기가 유일한 즐거움이 되고 희망이 되어 싸우면서도 열심히 교당생활을 했다. 이렇게 감사한 마음과 즐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최성덕 교무님의 크신 은혜라 생각된다.
국내에서도 우리 정법을 만나기 어려운데 만리타국에서 대종사님의 정법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생각하면 할 수록 이 회상 만난 기쁨에 항상 감사하고 법대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늘 챙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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