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시민에 대한 오해
10년도 더 전에 런던(또는 근교)의 시민들은 겨울에 집안에서도 외출복을 입고 있더라는 말을 듣고, 우리는 언제나 그리 될까, 선진국이라 역시 다르구나 하는 심정이었던 기억이 있다. 헌데 환경재난사에 관한 책(〈지구촌 환경재난〉, 박석순 지음, 도서출판 따님, 1997년 간행)을 읽고 보니 꼭 그런 것만이 아니다. 영국 런던은 안개와 석탄으로 인해, 18세기 산업혁명의 문제가 불거지기 훨씬 전인 1273년에 세계 최초로 대기오염 방지를 위한 석탄사용량 감소 칙령을 내린 바가 있다고 한다. 1306년엔 위반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기록도 있다는 것이다.
산업혁명 이후 대기오염에 의한 피해가 줄을 이었다. 그 중에서도 1952년 12월 4~10일은 공해 역사상 길이 남을 런던 스모그가 발생하였다. 1주일간 지속된 기온역전 현상으로 런던 시민은 첫 3주간 4천여 명이 호흡장애와 질식, 이어서 8천여 명이 만성폐질환으로 추가 사망하여 총 12,000여 명이 생명을 잃었다는 것이다. 이후 1953년 대기오염의 실태조사와 대책연구가 시작되었고, 1956년 대기오염 청정법이 제정되었다고 한다. 쉽게 말해서 런던 시민들이 선진국민이라서 겨울에 집안에서 외출복을 입었던게 아니었다. 위의 기록에 보다시피 약 800년, 기록에 없을 기간까지 감안한다면 아마도 천년의 세월을 대기오염으로 고생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죽어간 뒤에야 겨우 정신차리고 행동에 변화를 모색한 것이었다.

호응받지 못한 나의 걱정
과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시절(1987.3~1992.2) 나는 무슨 계기였던지는 잘 모르나 작게는 우리나라, 크게는 이 지구가 환경문제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게 될 것이라는 불안에 사로잡혔다. 음식(밥 한 알이라도) 안 남기기는 유난했었는데, 내가 전하려는 메시지보다도 기이한 행동이 흥미를 끌었던 것일까? 신문 방송에 몇 번 모습을 드러내면서 원불교 교당, 기관을 주로 하여 전국을 다니며 교단 내외에서 수년간 약 100회 정도 강연을 다녔지만 별 성과없이 직장에서의 해외 파견과 함께 운동가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게 되었다.
내가 운동을 그만두었다고 걱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단지 내가 너무 빨랐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외국생활을 5년 하고 돌아와 4년쯤 지난 지금, 내 생각이 틀렸음을 자각하고 있다. 10년도 더 전에 뜬금없이 들었던 그 지구적 환경문제에 대한 불안감이야말로 쥐나 두꺼비, 뱀과 지렁이들과 같은 미물도 가지고 있다는 재난에 대한 생명적 자각이 아니었을까? 요컨대 내가 불안해 했던 사태는 생각보다 빨리 닥쳐올 것 같다. 지금 돌아가는 지구규모의 환경상황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지구적으로 심각한 재난이 올 수 있음을 예상케 한다.

식량도! 석유도!
자력없는 한국의 한심한 현실


그렇다면 한국은? 한마디로 말해서 한국은 자력이 매우 부실한 국가다. 우리나라는 식량(식량자급도 25%)부터가 자립적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게 심각한 문제라는 인식조차도 없다. 더구나 에너지는, 2004년 통계에 의하면, 석유가 45.7%를 차지하는데 그나마 이는 그 동안 석유의존도를 줄이려는 노력의 결과다. 거기에 석탄(약 24.1%)과 원자력(14.8%), LNG(12.9%)가 뒤따르고 있고, 에너지의 해외 수입의존도는 2006년 통계 기준으로 무려 96.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자동차수의 증가는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승용차가 부자의 상징이었던 시절이 그리 멀지 않은, 내 어렸을 때의 일인데 마이카 시대라는 말이 옛말처럼 들리고 2000년에 들어서면서 우리나라의 차량 수는 천만대를 돌파한다. 이제 자가용이 생활필수품이라는데 아무도 이의를 달지 않는다.

회사 재직시절(2000년경) 차장진급과 함께 주어지는 차량지원금 20만원을 못 찾아가는 사람은 나 하나였다. 당시엔 내가 운전면허조차 없었으니 승용차의 편리함에 대해 말하기 조심스러웠지만, 학원운영을 하면서 필수라고 생각하고 운전면허를 취득해서 꼭 1년간 자가용 운행을 경험한 나는 지금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승용차가 없어도 살 수 있더라는 사실, 오히려 나를 자꾸 게으르게 하고 그나마 걸어다니는 시간마저 뺏어 나의 생명력을 줄이더라는 사실을.

망할 세상 - 석유문명의 종말

망한다는 말은 비유가 아니다. 지금처럼 석유에 의존하는 우리나라, 지구경제는 이대로 지탱될 수 없다. 에너지원료 자립도 0%에 가까운 우리나라는 그런 파국을 다른 나라보다 더욱 갑자기, 비극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환경문제와 연결 짓는다면, 대한민국 금수강산의 환경은 너무 좋았다. 앞에 예를 든 런던이나 세계적 환경재난을 당한 다른 나라들에 비한다면 그 동안 너무 축복받은 나라였다. 해마다 한번이라도 그런 하늘의 축복과 조상들의 선견지명에 감사를 나타내는 행사라도 벌였어야 마땅했다. 새만금 사업이나 4대강 사업 등을 보면서 내가 다다른 결론은, 국민 전체가 더 큰 재난을 겪고 나서야 정신을 차려 근본적인 해결책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는 것! 쉽게 말해서 우리나라의 국민들은 더 많은 재난과 더 많은 희생을 겪고 나서야 자연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는 피할 수 없는 경로다.

단언컨대 지구의 석유는 끝이 난다. 그게 꽤나 멀리 있을 줄 알았던게 내 오산이었다. 여기서 석유자원의 매장량과 산출량의 정점 도달 징후와 소비량의 급증 추세에 관한 기나긴 인용을 할 수는 없겠지만, 요컨대 중국과 인도마저 소위 근대화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그들의 그런 산업화를 막을 힘과 권한과 자격이 어디에도 없음을 감안한다면 석유자원의 고갈은 더욱 가속될 것이다.

석유에 중독되어 살아가는 현재의 인간들과 그들이 일구어 놓은 석유문명은 이대로 망할 수 밖에 없다. 그 기미는 이미 보이기 시작했고 21세기에 급격히 진행될 것이다. 굳이 원불교의 역사와 연결짓는다면 원기 100년(서기2016년) 즈음이 석유문명에 분명한 경고등이 켜지는 시점이 되지 않을까?

새로 올 세상

석유문명 이후는 석유에 의존하지 않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넘겨 받을 것이다. 이들은 석유에 의지하지 않고, 태양에 근원한 대체에너지를 주로 하여 먹을 것을 생산하고 입을 것과 살 곳을 만들어낼 수 있는 자력을 가진 이들일 것이다.

이들, 새로운 문명의 주인공들은 크지 않은 지역공동체에 기반을 두고 서로 가진 재능과 재화를 나누며 살아갈 것이다. 이것이 전망품 26장에 면면촌촌에 학교, 동리동리에 교회당 운운하며 말씀하신 내용과 부합될 것이다. 서울 근교에 인구의 반이 몰려 있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분명 그 시대가 아닌 것이다. 자연을 좋아하고 인공물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 전망품 24장 또한 거대 건물보단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새로운 자연관, 예술관을 지적하신 대목으로 보인다.
새로 올 세상의 인간들은 지금과는 다른 차원의 가치관을 품고 살아갈 것이다.
석유에 미쳐 남의 나라 석유라도,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사용하려는 미국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지금 같은 세상은 분명 아닐 것이다.

거기 질세라 자신들도 문명화를 하겠노라고 나서는 중국과 인도, 그에 못잖게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의 자본주의 체제와 경쟁적 가치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가치관이 세상에 퍼져 갈 것이다.

오는 세상의 모든 인심을 말씀하신 전망품 20장은 이 글을 쓰는 내 마음에 적지 않은 위로가 된다. 그러나 그 세상이 오기 전에 인류가 겪을 어려움을 생각하면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다.

초기 교단사를 연구하여 그 당시의 공동체 생활상을 연구할 필요가 있다. 그때를 재현하되 그 이후에 개발된 적정기술(유기농법, 생태 건축, 자전거, 손수레, 인력과 동물을 이용하는 농기구, 에너지 효율이 높은 통신체계와 전등 등)을 활용하여 의식주를 비롯한 생활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공동체를 시작하는 것도 원불교가 세상에 제시할 수 있는 비전이 될 것이다.

길게 말할 자리가 없지만 시급한 일이다. 생태적 공동체를 제시하는 분야에서 원불교의 자산은 그 어떤 종교나 단체에도 뒤지지 않을 것이다. 이를 인류역사에 새로 올 세상의 한 모델로 제시할 수 있다면 그 얼마나 좋은 일이겠는가?
▲ 장택희 공학박사
    스타피아 학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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