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휴암좌선문'에 밝힌 좌(坐) 공부는 동정 간에 적적성성을 수호하는 공부이다.
'일원상 서원문'에서 심신을 원만하게 수호하는 정신수양의 공부와 같은 의미이다.
정산은 정신수양의 방법은 염불, 좌선, 무시선법이 주가 되고, 사리연구 작업취사는 선의 요건이 된다고 하였다.(〈정산종사법어〉 경의편 15장)

몽산은 동정 간에 적적성성한 자성의 혜광을 얻는 공부로 동정 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좌 공부와 밝은 지혜를 나타나게 하는 혜 공부로 경계에 해탈하는 선 공부를 밝히고 있다.
좌와 선 공부는 지선의 자리를 통달해서 마땅히 스스로 성성하게 하는 것이다. 몽산은 휴휴암좌선문 전문에서 좌와 선 공부를 밝히고 있다.

좌(坐) 공부에 대해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온갖 생각 생각을 끊고 끊되 혼침에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는, 바깥 경계가 안으로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안 마음이 바깥 경계로 나가지도 아니한다.
셋째는, 외경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중심이 적적하여 요동하지 아니한다.
넷째는, 역경과 순경에도 끌리는 바가 없고 소리와 색에도 굴리어 가는 바가 없다.
다섯째는, 차별 있는 경계에서 차별 없는 정에 드는 것이다.
여섯째는, 천만 경계에 치연히 작용하나 마음의 정체가 여여 부동하다.
이어 좌 공부는 동정 간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 부동의 공부를 의미한다.

선(禪) 공부에 대해 밝히면 다음과 같다.

첫째는, 욕심 경계에 있으되 욕심이 없고 티끌 세상에 살되 티끌에서 벗어난다.
둘째는, 주착하는 데도 없고 의지하는 데도 없어서 떳떳한 광명이 앞에 나타난다.
셋째는, 밖으로 쏠리는 정신 빛을 돌이켜 비추어서 자성 본원에 사무치고 있다.
넷째는, 깊숙한 데 비치매 그 광명이 일월에 넘치고 만물을 길러낼 때는 그 덕이 하늘과 땅보다 더 크다.
다섯째는, 차별 없는 경계에서 차별 있는 지혜를 나타낸다.
여섯째는, 종으로나 횡으로나 묘용을 얻어서 일과 일에 걸림 없다.
선 공부는 동정 간에 자성의 광명으로 비추는 공부임을 밝히고 있다.

마치 '반야심경'의 반야의 지혜를 얻어 마음이 도무지 경계에 구애되고 걸리지도 않아서 두려움이 없고, 무명 번뇌에 사로잡혀 헛된 꿈의 세상을 멀리 떠나 이 보다 더 위가 없는 큰 진리를 깨쳐 얻은 경지와 같다.

좌와 선의 공부를 대략 말하면 이와 같으나 자상히 들기로 하면 지묵으로 능히 다 할 바가 아니다.
나가(那伽)의 큰 정은 정도 없고 동도 없으며 진여의 묘한 체는 생도 아니요 멸도 아니다.
마음이 경계에 부동하는 좌 공부와 청정하여 밝게 하는 선 공부의 표준으로 삼아서 동정일여 공부를 해야 한다.
<원광대학교병원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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