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이 가족, 신앙으로 결속
익산 왕궁면 한센인 정착촌

평균 수명의 증가로 한국 전통가정의 형태를 벗어나 새롭게 구성되는 가족이 늘어나고 있다. 또 세대별로 인지하는 가족에 대한 의미도 다양하다.
이에 본지에서는 가정의 달 5월을 맞아 '또 다른 가족이야기'라는 주제로 가족의 의미를 새롭게 조명해 보는 기획기사를 마련했다.
1주 가족의 의미와 형태 변화, 2주 70대 부부의 일상, 3주 소년소녀가정의 애로점 및 실태, 4주 한센인 정착촌의 공동체 가족을 취재했다.
▲ 익산시 왕궁면 소재 한센인 정착촌의 모습.
국내 최대 규모의 한센인 정착촌(왕궁면 소재)인 이곳은 1960년대부터 자활의 방편으로 축산업을 하고 있다. 한센병 1세대는 연로해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는 형편이다. 대체로 2세나 친척들이 축산업을 이어가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삼동회 왕궁노인복지센터의 최명란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15일 한센인들의 정착촌을 찾았다. 익산시 끝자락에 위치해 생활권은 완주군 삼례읍에 가까웠다.

17년 전 소록도에서 봉사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방문했다. 이미순(66)씨는 보기에 평범한 동네 어르신이었다. 일반인과의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였다. 이동하면서 만난 한센인 역시 대체로 그런 느낌이었다.

이 씨가 살고 있는 방은 9평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이 씨는 "경북 의성군에서 태어나 7살 때 병을 얻었다"며 "병 때문에 집을 떠나 밥 동냥부터 빨래, 밭일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다. 일반인들 뿐 아니라 같은 한센인에게 온갖 핍박을 받고 살아왔다. 잠시 안동에 있는 성자원에 모여 살다가 소록도로 이동하게 됐다"고 지난날을 회상했다. 소록도로 이주한 후에도 양부모의 매질과 고문에 몸서리를 치면서 살아왔다고 했다. 1961년 국가 정책으로 왕궁면으로 집단이주하게 됐는 데 그때 받은 번호가 1200번이란다. 18세 되던 해 같은 한센인과 결혼 그는 지금까지 정착촌에 살고 있다. 남편은 3년 전에 세상을 떠났다.

평생을 차별과 핍박 속에 살아온 그에게 이웃은 어떤 의미일까. 540여 명이 살고 있는 정착촌은 또 다른 가족들이었다. 이 씨는 "마을회관이나 모정에 모여 이웃들과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고 있다"며 "몸이 좋았을 때는 약간씩 품앗이도 했지만 워낙 몸이 약해 이제 그런 일은 못한다. 텃밭을 겨우 일굴 정도로 정부지원금에 의존해 생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발가락이 없어서 보조 발을 끼고 있었다.

그에게 또 다른 가족은 교회였다. 90%이상의 한센인들이 교회를 다닐 정도 신앙에 의존하고 있었다. 집사 권사가 수두룩하다는 말에서 한센인들의 신앙공동체가 엿보인다.

다음에 소개받은 곳은 한센인 부부다. 이용관(85)·강춘자(78)씨 부부는 13년 전 이곳에 정착했다. 대전 애경원이라는 곳에 살다가 시설이 없어지면서 이곳에 온 것이다. 그들은 "뒤 늦게 정착촌에 들어왔다는 이유로 텃세가 있었다"며 "정기총회 때 발언권 문제나 이웃간 대화를 할 때 약간의 불편함을 느꼈다. 지금은 모두 가까운 이웃사촌으로 지낸다. 다만 내 몸이 아프니까 도움을 주지 못해 안타깝다. 한센인들은 대부분 70세 이상의 고령이고 병을 앓아 국가의 복지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들 역시 수요일과 일요일에 진행되는 교회 예배에 참석해 또 다른 가족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들에게 신앙은 현실의 역경을 이겨내는 힘이자 소천한 후 천국에 정상인으로 태어나고자 하는 희망의 열쇠일지도 모른다.
▲ 최명란 사회복지사의 도움으로 왕궁면 한센인촌을 방문했다.
최명란 복지사는 "복지센터에서 1주일에 한 번 씩 요양보호사를 파견해 밑반찬 지원이나 병원동행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며 "어르신들끼리 서로 위로하고 살다보니 외부에서 오는 사람에게는 쉽게 정을 주지 않는다. 정착촌 내의 결속력은 굉장히 강하다. 그러다보니 배타적인 성격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곳 정착촌은 가족적인 끈끈한 면보다는 신앙적인 면이 더 강해 보였다. 같은 처지이기 때문에 서로 의지가 되고 위로가 되는 편이지만 행정을 책임지고 있는 농장 사무실에 철저히 귀속돼 살아가는 모습도 눈에 띤다.

정착촌은 단층 다세대 주택처럼 9평 남짓한 방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 이웃이 가족일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가졌다. 일생동안 가족을 떠나 살아온 이들이 국가정책에 의해 정착촌을 형성해 왔지만 그 속에는 역시 이웃이라는 가족이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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