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불은 누가 대신해 줄 수도, 미룰 수도 없는 일
교법대로 훈련하고 교화할 때 일원대도 드러나게 돼

유난히 추웠던 겨울 끝자락에 옷깃을 여미고 산책을 나섰다. 아직도 칼바람이 옷깃을 헤집고 들어와 산에 오를 엄두는 못 내고 들녘이나 걸어 보자는 생각에 발길 닿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텅 빈 들녘을 걷고 있노라니 문득 학교 갔다 일찍 와서 논에 나가 새 좀 보라시던 아버지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듯했다. 참으로 따분했던 새 보기! 하지만 추수가 끝날 때까지 날마다 새 보기를 계속했다. 

그 후 출가하여 시작한 좌선, 매일 정좌하고 앉아 일어나는 사심 잡념 보기를 계속했다. 추수가 끝난 들녘이 텅 비듯 어느 순간 마음 밭에 사심 잡념도 사라졌다. 〈금강경〉에 수지독송이란 구절이 나온다.

수지독송이란 '텅 빈 들녘과 같이 사심 잡념이 사라진 본래 마음을 잘 지켜 세상을 살면 부처님의 지혜 덕상을 나툰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자리가 곧 성품의 진체이니 사량으로 이 자리를 알아내려 말고 관조로써 이 자리를 깨쳐 얻으라"는 대종사의 가르침을 다시 새기며 받든다. 그런가 하면 "부처와 조사는 자성의 본래를 각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었다"라고 하신 각득(覺得)의 의미도 텅 빈 들녘이나 사심 잡념이 사라진 본래 마음을, 배우거나 가르침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일어나는 사심 잡념을 잠재웠을 때 얻어지는 것이라는 뜻으로 짐작하게 되었다.

입교도 하지 않고 교당에 다니던 시절부터 친구 따라 흥얼거렸던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 괴로움 바다와 불붙는 집에서 건져 주 살려 주 우짖는 저 소리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이라는 성가를 부르고 또 부르다 보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그 책임은 내가 꼭 져야만 할 것 같은 막연한 사명감이 솟구쳐 올라와 반드시 이생에 성자가 되어야 할 것 같은 심정으로 살았던 때가 있었다. 

신년 새 아침을 맞아 종법사님의 법문을 받들 때 갑자기 그 옛날 그 감정이 솟구쳐 올랐다. '불자야 듣느냐'는 노랫말을 흥얼거리며 전무출신으로 살아가는 내가 온 인류에게 이 법을 전해줘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사는 것 같은 죄책감과 책임감 사명감 등으로 마음에 중압감이 더해질 때 문득 모든 사람이 하루라도 빨리 마음의 근본을 알고 살도록 해야 할 것 같다는 마음이 일었다. 

하지만 서두른다고 되는 일도 아니기에 먼저 해야 할 일이 무엇일까 고민하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를 찾게 되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른 것이 아니라 지금까지 해오고 있는 일 즉 성불하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일은 누가 대신해 줄 수도 없고 반드시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며 뒤로 미룰 일도 아니라는 것이 자명하였다.  

교화장소가 비록 허름하고 교도 수는 적어도 예나 지금이나 우리가 가진 비장의 무기, 성불할 수 있는 확실한 지도가 우리 손에 있고, 그 길의 끝을 가본 스승님들이 있고 그 길을 함께 가는 도반들이 있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단지 걱정되는 일은 아침에 수양정진, 낮에는 보은봉공, 저녁에는 참회반성하는 수도인의 일과를 하찮게 여기고 산다든가, 출가한 사람만 지키는 것이라 착각하는 것이다. 나도 착각하고 살다 뒤늦게 후회를 했지만 수도인의 일과를 지키는 일은 수도하는 사람이나 마음공부 하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이웃 종교인 심지어는 무종교인까지도 이 일과대로 살아야 성불을 한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사람이 다 그렇게 살라고 그 길이 부처님 되는 길이며 성자가 되는 길이라고 밝혀준 스승님의 깊은 뜻에 감사를 올린다. 

그런데 혹여 우리가 우리의 교법을 책장에 올려두고 살아간다면 훗날에도 지금의 모습과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지만 날마다 정해진 일과에 따라 우리의 교법대로 자신을 훈련하고 공들이며 주위 모든 사람에게 이 법을 전해주는 성업을 계속함에 따라 일원 대도가 조금씩 조금씩 드러나고 밝아지며 번듯하게 세워질 것이다.

그리되면 세상은 바른 질서가 세워지고 평화가 정착되며 남북뿐 아니라 전 세계가 하나로 사는 낙원 세계로 변화될 것이다. 

[2018년 3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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