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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지도인의 문답공부가 훈련의 시작
[교리문답]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지도인의 문답공부가 훈련의 시작
  • 유원경 기자
  • 승인 2019.07.09
  • 호수 19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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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혁 영산선학대학교 총장

교화단, 공부인들이 대종사의 법을 점검받는 조직
수양·연구·취사가 따로 아닌 동시 공부, 원만한 용심법
사량 계교심 없이 진심이 통해야 법정 건네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교당내왕시주의사항은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는 중 교당을 내왕할 때 어떤 표준으로 공부하는가를 밝혀놓은 것이다. 교당에서 공부인들이 생활 속 마음공부를 점검해가는 길이 밝혀져 있는데, 그 가운데 정기와 상시훈련의 관계, 교당의 구체적 역할, 문답 감정에 대한 궁금증들을 알아보았다. 이번 교리문답은 백인혁 영산선학대학교 총장을 찾아 문답했으며, 2회에 걸쳐 연재된다.

교당내왕시주의사항 1조와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에 대한 관계와 의미는
우리의 훈련법은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으로 돼 있다. 여기서 정기와 상시의 훈련이라는 개념이 중요하다. 훈련은 반복하면 이뤄진다는 의미다. 말하자면 우리는 원래 부처니까 부처가 살아가는 법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성불의 길이 열리는 것이다. 공부인이 이것을 전제하지 않고 무엇인가를 찾아 공들인다는 것은 허망한 일이 될 것이다. 또 소태산 대종사는 개개인이 자기의 성향대로 공부하도록 한 것이 아니라 공부하는 방법을 진리에 바탕해 밝혀줬다. 누구나 다 부처로 살기를 바라며 훈련법을 제정해 줬을 것이다.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의 핵심은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함이라 할 수 있고, 교당내왕시주의사항 1조는 문답 감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즉, 생활 속에서 늘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를 하다가 교당에 가게 되면 그간의 취사를 지도인에게 일일이 보고하는 것이 마음공부의 시작이다. 대종사는 〈정전〉 수행편에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부처로 살아가는 방법을 자세히 밝혀놓았다. 그렇게 수행의 길을 따라 일상생활에서 살아가다 보면 그동안 길들어진 습관 따라 자기 방식대로 하는 경우가 많을 것이므로 지도인에게 보고하여 감정과 점검을 받아야 바른길을 갈 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교당이란 지도인에게 문답 감정을 위한 장소인가
교당이라고 말하는 개념을 더 깊이 생각해봐야 한다. 초기역사를 보면 당시에는 교당을 회관이라 불렀다. 모이는 곳이라는 의미인데 어떤 이들이 모이는가, 마음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다. 대종사가 밝혀준 법대로 현실에서 실행해 보고 무엇이 잘되고 못되었는지 점검받는 곳이다. 교당에 공부인의 숫자가 많아지게 되면 한사람이 다 지도하기 어려우니 교화단을 조직해 지도인은 늘 아홉 사람만 지도하게 했다. 

교화단은 공부하기로 모인 사람들이니 그들을 바르게 이끌어 주기 위해서는 공부법을 바르게 알고 있는 사람을 단장으로 파견했다. 공부인들은 정해진 법회날이면 교당에 모여 교화단회를 진행해 단장과 단원들에게 일일이 지낸 일을 보고하고 감정도 받았다. 더 나아가 공부를 잘하는 도반이 있을 때는 교무와 전 교도들에게 공부하는 방법을 공유하도록 해 모두가 다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을 만끽하도록 했다. 즉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시비이해를 건설해가는 연습을 생활 속에서 단련하도록 한 것이다. 이렇게 교화단을 통해서 각자의 마음공부 즉 용심법이 일취월장하게 해줬고, 이러한 교화단들이 모여진 곳이 곧 교당이라 볼 수 있다.

용심법 공부가 곧 상시응용주의사항 1조 공부라 할 수 있나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한다는 것은 곧 삼학병진 공부를 하는 것이다. 육근을 작용하는 그 순간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를 하는 것이 곧 마음을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생각을 가지는 것은 곧 〈수심결〉에 나오는 정혜쌍수와 다름이 없을 것이다. 평소에는 대부분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 하지만 어느 순간 나, 내 것, 내 욕심, 내 생각이나 주장에 붙잡히게 되면 온전함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고 날카로운 칼날만 난무하게 된다. 

공부인이 마음공부를 할 때 온전하고자 하나 잘 안되는 것은 원래 너와 내가 하나인 것을 모르고, 나누고 쪼개는 데서 오는 것이다. 온전한 생각을 하고자 한다면 먼저 합하는 연습을 해야 할 것이고, 밝은 생각을 하고자 한다면 나만 알고 있다는 생각이나 나만 경험했다는 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따라서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고자 한다면 나를 놓거나 내가 없는 마음으로 취사를 해야 한다. 

또한, 우리의 육근 작용은 매 순간 살아서 움직이듯 이어지는데 모든 과목을 잘 익히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 하나하나에 사로잡혀 실지 생활에 적용하지 못하는 공부를 할 수가 있다. 온전한 생각에 바탕해 행하는 취사가 시간으로 보면 아주 순간인 것이다. 그러니 순간순간 작용할 때마다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가 되어야 삼학공부인 것이다. 멈추어 생각하고, 행하는 것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삼학공부요 용심법이라 할 수 있다.

온전함을 유지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산종사가 이런 예를 들었다. "개들도 평소에는 꼬리치고 잘 논다. 하지만 그 무리에 명태 대가리 하나 던져줘 봐라. 그때는 서로 으르렁 대고 싸운다." 던져진 명태 대가리가 곧 온전함을 깨는 것이다. 우리도 평소에는 온전하다. 경계를 대하기 전까지는 요란함도 어리석음도 그름도 없다. 경계 따라 일어난 마음이 온전함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다. 물론 수양에 있어서 보통급부터 여래위까지 정(靜)한 가운데 일심공부의 차이는 있겠지만, 경계에 동(動)하기 전에는 대체로 온전하다. 

온전함은 일원상법어에 밝혀줬듯이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할 때 언제나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것이다.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일원상이라고 교법의 총설에 밝혀줬다. 신앙의 대상이자 수행의 표본이니까 이를 놓치면 사실 공부를 해도 상시공부가 잘되지 않는다. 정리하자면 육근을 언제나 원만구족 지공무사하게 사용하는 것이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공부이고, 우리 모두의 본성인 일원상으로 신앙하고 수행을 할 때 우리는 원만구족 하고, 지공무사한 공부 길의 눈을 뜰 수 있을 것이다. 

지도인의 감정을 따르지 않는다면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가
대종사는 지도인으로서 준비해야 할 요법으로 지도받는 사람 이상의 지식을 가질 것, 신용을 잃지 말 것, 사리(私利)를 취하지 말 것, 일을 당할 때마다 지행을 대조할 것을 당부했다. 지도받는 이를 이끌어 주어야 하는 만큼 이 법문을 잘 살펴야 한다. 지도인은 교법을 가르치고 전해주는 사람이며, 이들은 당연히 용심법을 배우고 가르치는 사람이다. 때문에 자신의 경험담으로써 지도하거나 생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일원상 진리와 진리에 바탕한 삶을 지도해야 한다. 단지 자신의 경험을 지도한다면 자신의 지도법이지 대종사의 법을 전하는 지도는 아니다. 공부인이 배우고자 하는 방향이 그 지도인에게 있어야 지도받는 이가 따르는 것이다.

지도인의 실력이나 인품이 의심스러워 지도받기 싫은 마음이 난다면
누구나 지도받기는 싫어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 사람은 다 자기 잘난 맛에 산다. 하지만 우리가 마음공부를 하는 것은 자기 성향대로 살아 고통스러우니 자기 성향을 놓고, 부처님같이 살아서 혜복이 넉넉한 생활을 하려고 이 공부를 하는 것이다. 곧 자기가 변하려고, 진급하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지도받는 사람은 내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또한 배우려는 사람은 지도인의 인품이나 인격을 따라 배우려는 것이 아니다. 물론 훌륭한 인격을 닮아가는 것도 좋지만, 주가 되는 것은 혜복이 넉넉한 부처님의 삶을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지도하는 이가 출가위, 여래위가 아닌 이상 지도인도 공부하는 공부인 일 뿐이다. 대종사의 용심법을 배우고자 한다면 그 용심법을 가르치는 이가 나의 지도인이다. 나와 성향이 비슷하고 취미가 비슷하다고 내 지도인이 될 수 있는 것이 결코 아님을 자각할 필요가 있다.

하나 더 강조하자면 우리 공부법에는 대화하는 것이 많다. 우리는 서로가 언어를 가지고 소통을 통해 공부한다. 우리가 심고를 모신다고 할 때의 심고는 나의 삶을 고(告)한다는 의미다. 조석심고는 법신불 사은전에 고하는 시간이다. 그 사은전에 고하는 것은 일상에서 내 옆 사람이나 윗사람, 아랫사람들에게 잘 고하는 것도 해당된다. 곧 모두에게 내 마음을 잘 고해야 모두와 서로 통하는 것이며, 합하는 것이며, 하나 되는 것이다. 잘 고하려면 내 주변 인연들에게 성심으로 보여주고, 사량 계교심 없이 고해야 진심이 통하고, 진심이 통해야 또한 법정(法情)이 통한다. 공부인이 울타리를 쌓고 그 안에 나를 가두고서 서로 통하지 않으면 법도 전해지지 않는다. 지도하는 이도 지도받는 이도 이점을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2019년 7월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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