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최근 전국원음합창제에 나가게 되어 합창을 배우고 있다. 자의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지만, 원불교의 합창문화에 대해 배워보고자 하는 기쁜 마음으로 시작하게 됐다. 게다가 평소 노래하는 것을 좋아하는 터라 성악적인 발성을 배우는 것에 큰 흥미를 느끼기도 했다. 드디어 합창 연습을 시작하게 됐다. 연습을 시작하며 합창 지도와 지휘를 해주는 성악가 선생님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던진다.

"합창은 귀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처음 발성연습을 하며 목을 풀고 있는 우리에게 왜 귀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가? 그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에는 무슨 소리인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으나, 합창을 연습하면서 점차 알게 됐다. 

내가 좋은 발성을 낸다고 해서 꼭 좋은 노래가 되는 게 아니라는 것. 물론 내가 발성을 제대로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아무리 단단하고 정확한 소리를 낼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결코 좋은 합창이 될 수 없었다. 오히려 다른 파트가 돋보여야 할 때에는 부드럽게 소리를 내서 배경음처럼 들리도록 조용하게 소리를 내야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야 강조할 파트의 음이 자연스럽게 들리게 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이런 점을 모르고 나의 소리를 정확하게 내는 데에만 급급했다. 가사와 음정을 맞추기도 급급하다보니 내가 내는 것이 소리인지 노래인지도 모르고 목이 터져라 내뱉기 바빴다. 그러다 점점 악보를 내려다보는 시간이 줄고 함께 노래 부르는 사람들과 지휘를 볼 수 있게 되자 이제야 합창이 노래로 들려오기 시작했다. 파트별로 돌아가며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합하기도 나뉘기도 하는 조화로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가 되어서야 겨우 합창에 합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내가 한 연습은 혼자 노래 부르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정산종사는 "있는 것보다 없는 것이 더 큰 것이며 유념보다 무념이 더 크나니, 대개 유는 테가 있으나 무는 테가 없는 까닭이니라" (〈정산종사법어〉 원리편 27장)고 법문한다.

초반에 나는 합창을 하면서도 내가 노래 부르는 데에만 집중하고 틀리지 않으려고만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니 남들이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하고 나 혼자 좋은 소리를 내기 바빴던 것이다. 그런데 내 소리를 내려놓고 모두의 소리를 듣고 나니 오히려 나 혼자서는 하지 못할 더 큰 하모니가 감싸는 느낌을 받게 됐다.

원불교라는 좁은 우물 속에서도 각자의 소리를 내기 바쁜 사람들이 있다.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아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들. 처음에는 그런 사람들이 참 대단한 능력을 가지고 있구나 싶어 큰 인상을 받았지만, 결국 내 마음에 남고 영혼에 기억되는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묵묵히 공을 쌓고 자취 없는 덕을 기르는 이들이었다. 그런 이들은 마치 합창처럼, 대종사의 법음을 돋보이게 하는 화음이 되어 오히려 각자의 파트가 아름답게 만드는 큰 그림을 허공에 그려낸다.

이제 합창 연습이 무르익어간다. 다양한 소리가 하나의 화음을 만들어내는 노래 속에 전체의 합보다 더 큰 감동을 자아낸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9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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