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서양준 교무] 요즘 전국원음합창제에 참여하게 되어 합창 연습을 하고 있다. 그런데 솔로 파트를 담당하게 되어버렸다. 모두가 한 목소리를 내어 화음을 만들어가는 합창에서 나 혼자 한 화음을 맡아버린 것이다. 차라리 혼자 노래하는 것이라면 좀 못하더라도 내가 창피하고 말 것인데 다함께 없는 시간을 쪼개 연습하는 합창에 폐를 끼치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게다가 솔로 파트는 남자 파트치고 음이 상당히 높아서 내가 이것을 소화할 수 있을까 싶었다. 합창 연습이 끝나고 성악가인 지휘자 선생님을 찾아 음이 너무 높아서 잘 내기 어려우니 뭔가 요령이 없냐고 물었다. 그러자 단순명쾌한 답이 돌아왔다. '목 안을 다 열고 자연스럽게 호흡으로 내면 됩니다.' 이게 무슨 소린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원불교대학원에 수학하던 시절, 노래 못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실용음악학원에 등록한 적이 있다. 흥을 좋아하는 한국 문화에서는 노래를 잘하면 좋은 이미지를 줄 수 있기도 하고 앞으로 단상에서 노래를 부를 일이 많다고 생각이 들어서 큰 맘 먹고 학원에 등록하게 됐다. 처음 학원에 가게 된 날 한번 노래를 불러보라는 요청에 평소 즐겨 부르는 노래를 불렀다. 가만히 다 듣고 있던 보컬 코치가 이야기했다. "양준씨는 고음을 부를 때 너무 신경을 많이 쓰네요. 저음을 부를 때처럼 자연스럽게 불러보세요." 거기까지는 예상했다. 그런데 한 마디를 더 붙이는 것이다. "그리고 저음을 낼 때는 고음 낼 때처럼 더 정성스럽게 내보세요." 즉 저음을 내든 고음을 내든 모두 자연스럽고 정성스럽게 내라는 것이다. 그렇게 수업은 시작됐다.

호흡을 뱉을 때는 어떻게 하고 소리를 낼 때에는 어디에 신경을 쓰고 그러면서도 감정을 잘 살리면서 가사에 빠지듯이 부르라는 등 수많은 것을 배우면서 오히려 자연스러움이 저 멀리로 도망가 버리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많은 것들을 신경 쓰면서 어떻게 자연스럽게 부르냐고 물으니 돌아오는 대답이 가히 법문이었다. "오리가 물에 자연스럽게 떠있는 것 같지만 물 밑에서 수없이 발을 휘젓고 있는 것처럼, 자연스러움은 자연히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솔로 파트를 자연스럽게 내기 위해 연습을 하며 대학원 때 배웠던 레슨을 떠올려보았다. 자연스러움을 얻기 위해서 오리가 발을 휘젓듯, 자연스럽게 호흡이 나갈 수 있도록 이리저리 연습을 하다 보니 조금씩 익숙해지는 것이 느껴진다. 원불교 공부도 노래하는 것과 비슷한 점이 많다. 길은 결국 하나로 이어지는 것일까, 종교의 가르침도 자연스러움을 추구하지만 그 자연스러움이란 자연히 알아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선(禪)이라 함은 원래에 분별 주착이 없는 각자의 성품을 오득하여 마음의 자유를 얻게 하는 공부(〈정전〉 무시선법)라고 했다. 마음이 자유로움을 얻기 위해선 그 얼마나 많은 노력이 필요한 것인가. 총부 대각전에서 선하는 모습을 보면 그 편안함이 이루 말할 수 없으나, 그 편안한 자세 속에 치러지는 마음의 전쟁은 그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을 만큼 치열하리라. 자연스럽게 노래하고 선하고 살아가기 위해 오늘도 열심히 발을 저어본다.

/원광여자중학교

[2019년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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