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오광익 원로교무] 본(本)에 대해서 고전에서는 〈설문〉에 "근본은 나무 아래를 말하여 근본이라 하니라(本 木下曰本)", 〈좌전·소공원년〉에 "나무와 물은 뿌리와 근원이 있는 것이라(木水之有本原)", 〈대학〉에 "물은 근본과 끝이 있고 일은 시작과 마침이 있는 것이라(物有本末 事有始終)", 〈사기·굴원가생열전〉에 "사람이 궁극에는 근본으로 돌아가니라(人窮則反本)."

성(性)에 대해서 고전에서는 〈설문〉에 "성은 사람의 양기로 성품이 착한 것이라(性 人之陽氣 性善者也)", 〈광아〉에 "성품은 바탕이라(性 質也)", 〈중용〉에 "하늘이 명한 것을 성이라 이르니라(天命之謂性)", 〈논어〉에 "성은 서로 가깝지만 습관은 서로 멀어지니라(性相近也 習相遠也)." 이상에서 '본(本)'과 '성(性)'에 대한 옛 사람들의 고견을 문장을 통해 읽어 보았다.

과연 '본성(本性)'이란 무엇인가? 생래(生來)의 천성(天性)을 말한다. 즉 사람이 선천적으로 타고난 성질로서 변역(變易)한다거나 천이(遷移)할 수 없는 고유한 성품이요 성질이며 개성이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중국철학사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성즉리 심즉성(性卽理 心卽性)"의 문제라 할 수 있다. 이는 정주이학(程朱理學)의 인성(人性)에 관련된 중요한 명제(命題)이다.

이 명제는 정이(程頤)의 제출로 말미암아 주자(朱子)에 이르러 발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정이는 이(理)란 바로 하늘로 사람에게 부여되어 성(性)이라 했고, 그 성이 사람에 나타난바가 있는 것이 바로 마음이라고 인식했다. 따라서 유형의 마음은 유사시(有事時)에 일을 주관할 때는 여기에 있지만 무사시(無事時)에는 나타나지 않음으로 형체를 볼 수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본질상에서 말하자면 마음과 성품은 하나로 이 혹 천리(天理)에 근본하고 있다 했다. 정이는 "심(心)이나 성(性)이나 천(天)은 하나의 이(理)이다. 이치로 말하면 천이라 이르고, 품수로 말하자면 이라 이르며, 사람에게 있는 것으로 말하자면 심이라 이르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을 여의고 정(情)을 따른다면 반드시 쟁탈로 나아가게 되어 분수를 무시하고 이치를 어지럽힘과 합쳐져서 난폭함으로 귀결 된다 했다. 그러기 때문에 반드시 사법의 교화와 예의의 도가 있어어진 뒤에야 사양으로 나아가고 문리에 합치되어서 다스림으로 귀결이 된다.

〈맹자〉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안다(盡心知性)"고 말했다. 선종에서는 마음이 바로 성품이라 하여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며 단번에 깨달아 부처를 이룬다(明心見性 頓悟成佛)"고 했다.

〈황벽산단제선사전심법요〉에 "마음과 성품은 다르지 않나니 곧 마음이 바로 성품이라(心性不異 卽心卽性)"고 했다.

송(頌)하기를
심성원래재(心性原來在)  심성은 원래 있는 것이요
이원본시존(理源本始存)  이원도 본래부터 있으니
각명무소매(覺明無所昧)  깨치고 밝혀 어둔 바 없으면
혜복벽홍문(慧福闢鴻門)  지혜 복락의 큰 문 열리리라.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19년 9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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