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산 조정중 원로교무
생활 속 성리공부 1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일상생활 속에서 상시응용주의사항으로 공부하면서 훈련을 통한 스스로의 공부가 강조되고 있다. 훈련은 성품을 떠나지 않고 수호 활용하는 공부법으로 근본적으로 성리의 공부가 기초돼야 한다. 이번 교리문답은 성리공부에 대한 해오를 얻기 위해 준비했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인산 조정중 원로교무를 모시고 생활 속 성리공부에 대한 질문들을 문답했으며, 2회에 걸쳐 연재된다.

성리품 31장에서 설명한 '관조로써 깨쳐 얻는 공부'는 어떤 공부인가
성리공부란 법신불일원상의 진리와 법신불사은의 현실이 둘 아님을 알고 깨치는 공부이다. 그러나 보통 말하기를 '우주의 진리와 성품의 원리를 깨닫는 공부'를 성리공부라고 한다. 성리공부에 입문하는 수행자 중에는 과거부터 수행해 온 근기가 높은 사람도 있고 낮은 사람도 있어서 지도하기가 쉽지 않지만, 대개의 경우는 교조의 교법을 통해 이론적으로 또는 철학적으로 사고하고 추리하며 완전한 이해와 깨침에 접근하려고 노력한다.

이 모든 공부 과정을 '사량으로 성리 자리를 알아내려 하는 공부'라 한다. 그러나 진정한 성리의 근본을 뚫어 도달하려면 말과 글, 행동 등 어떠한 방법으로도 깨침을 주고  받지 못한다. 다만 수행자가 스스로의 정신수양을 통해 그 자리를 회복하고 스스로 깨끗하고 밝은 정신 눈으로 여실히 보며, 그 본 것이 깨달음이 돼야 비로소 견성을 했다고 말한다. 생각하면 틀린 것이며, 둘이면 그것도 틀린 것이다. 정일하게 하나 된 마음눈으로 보는 것이 관조다.

관조로 깨쳐 얻는 길은 딱 둘이 있다. 하나는 좌선할 때나 또는 쉬는 시간에 심안으로 관조하는 법이다. 고요히 있을 때 분별심을 멈추고 텅 빈 가운데 지극히 광명한 허공법계를 비춰보는 방법이다. 홀연히 법계의 공간은 나의 공간이 되고 법계의 광명은 나의 광명이 될 것이다. 그 영명한 자리에 오래 멈춰있으면 스스로 보게 되고 깨침이 생기게 된다.

두번째 길은 천지만물의 현실세계를 한 눈으로 보는 것이다. 한 광명으로 서로 비추며 한 기운으로 서로 응하여 하나의 얼을 이루고 은혜가 된 것을 그 실상 그대로 보며 깨침을 얻는 것이다. 이 관조 공부는 순수한 느낌과 감각으로 이루는 공부이다. 
 

의리선·여래선·조사선에 대해 설명하자면
선(禪)이란 광범한 의미로 진리공부와 마음공부를 말한다. 석가모니 당대부터 달마에 이르기까지 인도에서 행하여진 선법을 대개 여래선이라고 한다. 또한 불법이 중국에 건너오면서 달마로부터 혜능에 이르기까지 많은 조사(祖師)에 의하여 변화되고 발전한 선법을 조사선이라고 한다. 여래선과 조사선은 근기가 매우 높은 수행자의 선법을 대변한다. 의리선은 중·하근기의 수행자들이 부처님의 교법을 의리적으로 또는 합리적으로 사리에 맞게 해석하고 이해해 깨침을 얻어가는 선법을 말한다. 

석가모니가 설한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 등 주요 경서에 의하면 여래선·조사선·의리선의 내용이 총괄적으로 함장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3종의 선법이 유행하게 되었나. 그것은 후래 제자들이 특성적으로 법을 전수하여 전파함에 그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여래선 도리란, 석가모니 당대에는 과학의 발전이 없었고 물질의 세계에 대한 견해가 속박, 고, 윤회 등으로 이해됐기 때문에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해탈, 피안, 극락에 도달함을 수행의 덕목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그 당시의 선은 고를 면하여 극락에 이르고 속박을 해탈하여 자유를 얻으며, 차안을 떠나서 피안에 이르는 이른바 도피안의 선법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같은 선법이 여래선 도리이다. 그러나 달마 이후 중국의 역대 조사에 의하여 번뇌가 곧 보리요, 피안이 곧 차안이며, 마음이 곧 극락이요, 내가 곧 조물주라는 파격적인 수행법이 들어서면서 조사선의 도리가 성행하게 된다. 

불교 교법의 특징은 '일체유심조의 도리'와 '불이문의 도리'로 요약할 수 있다. 조사선은 이 두 특징을 잘 살린 매우 발전적인 선법으로 알려져 있다. 의리선은 여래선 도리와 조사선 도리에 관계없이 부처님의 말씀과 법에 의지하여 사리를 궁구하고 마탁하여 점진적으로 깨침을 얻어가는 공부법이다.
 

대산종사 법문에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서는 세 가지 수행의 길이 있는바 첫째는 선과 기도와 염불로써 선정 삼매의 대정정(大定靜)에 드는 것이요, 둘째는 의심으로써 한 가지 의심으로 만 가지 의심이 지극히 공한 의단(疑團)을 뭉치는 것이며, 셋째는 철저한 수행으로 지극히 정성스럽고 쉼이 없는 정진 적공을 쌓는 것이니라"했다.대정정이란 무엇이며,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이룰수 있는가
소태산 대종사는 언설과 논리, 소망하는 분별식심으로는 이 정각에 도달할 수 없음을 간파하고, 오직 일심의 기도와 선정으로 진리와 합일하는 지극한 경지에 들게 됐다. 이 같은 지극한 경지를 정성을 다해 오래 수호함으로써 정의 삼매를 이루고 정각을 성취했다.

선과 기도, 염불은 명분과 행위만 다를 뿐 한 가지 수양과목으로서 심지의 정을 세우는 데는 한 길로 통하는 묘리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일심이다. 그 일심은 자성의 지혜광명과 합일을 이루고, 우주의 신령한 영기와 합일을 이루어 둘 아닌 자리에 깊이 사무치게 된다. 이러한 경지를 '정(定) 삼매의 대정정'이라 한다.

한 마디로 밝히면 수행자는 새벽 좌선과 저녁 염불로 능히 대정정에 들 수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반드시 무시선의 지속적인 선 일념이 병행돼야 한다. 좌선과 염불을 단지 습관적으로 수행하면 불가능하다. 

신분의성으로 좌선과 염불을 무섭게 촉진해야 가능하다. 좌선과 염불의 체를 잡고 벼릿줄을 세우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많은 시간을 보낸다 해서 선공부가 성공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대종사는 줄만 잡으면 비행기 탄 폭은 되리라 말씀했다. 

대정정을 얻는 선 공부 길에 단전(丹田)의 필요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의 영혼에는 단전이 없다. 단전은 육근에 속한 것이다. 단전은 지구의 바다와 같고, 우주의 블랙홀과 같은 것으로 비유할 수 있다. 육근은 마음공부에 절실히 필요한 도구이듯 단전 역시 선 공부에 절실히 필요한 도구인 것이다. 단전은 자성의 지혜광명과 우주의 영기가 조회하는 곳이며, 오묘한 조화를 이루는 처소이다. 

종교에 따라서 상단전(眉間)을 주장하는 경우도 있지만 우리가 주장하는 하단전(下腹部)은 건강상에도 매우 중요하다.
 

한 가지 의심으로 일만 가지 의심이 공한 의단을 뭉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이며, 수많은 일을 처리하는 현대사회에서 어떻게 한 가지 의심으로 의단을 뭉칠 수 있는가
이 말씀은 의심을 가지라는 것이다. 의심은 각(覺)으로 들어가는 문로이다. 하나의 큰 의심으로 만 가지 의심을 총섭하며 하나의 정각(正覺)으로 귀일시켜야 한다. 불가에서는 통만법명일심(通萬法明一心) 공부라 하고, '이 무엇일까' 하는 공부라고도 한다. 쉽게 풀이하면 '나에게 마음이 있으니 마음이란 무엇인가'하는 하나의 큰 의심을 말하는 것이다. 마음은 지극히 공하고, 지극히 원만하여 이보다 큰 자리가 다시없고 이보다 큰 의심이 다시없는 것이다. 오늘 이 질문은 매우 훌륭하다. 우리가 평소에 연구할 일도 그리 많은데, 어느 하가에 '공한 의단'을 뭉치겠는가 하고 물었는데 '일즉다 다즉일(一卽多 多卽一)'의 원리를 적용해 공부하기를 당부한다.
 

성리품15장에 대종사 친히 도량의 눈을 치며, "나의 지금 눈을  치는 것은 눈만 치기 위함이 아니라 그대들에게 현묘한 자리를 가르침이었노라"했다. 대종사가 가르친 현묘한 자리는 무엇인가
하늘에서 눈이 내리는 것은 천지가 천지의 도를 다하는 것이요, 대종사께서 눈을 치시는 것은 사람이 하늘의 도를 체 받아서 사람의 도를 다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정산종사는 산동교당에서 정양할 때 '요재임천 가색유인(潦霽任天 稼穡由人), 장마지고 날 개는 것은 하늘에 맡기고 심고 가꾸는 것은 사람에 연유한다'고 말씀했다. 같은 뜻으로 표현하신 것이 아닌가 싶다.
옛 사람들은 진리를 철학적으로 말을 해야 알아듣고, 지금 사람들은 진리를 예술적으로 말을 해야 알아듣는다고 한다. 정산종사의 시구는 철학적이라면 대종사의 표현은 한 폭의 그림으로 보여주신 예술적 표현이라 할까. 

대종사는 가능한 한 쉽게, 가능한 한 간명하게, 가능한 한 사실적으로 법설했다. 그러나 오늘 나는 대종사의 '현묘한 진리'의 가르침을 이렇게 생각한다. 
원불교 신앙의 특징은 법신불일원상의 진리와 법신불사은의 사실을 일치시킨 표현이며, 진리의 체와 용을 함께 보인 표현이며, 천지와 생령이 도무지 하나임을 표현한 법문이며, 우리 회상의 모든 수행자는 낙원세계 건설의 행동하는 일꾼으로 거듭 나라는 표현으로 생각한다.

[2019년 10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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