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길튼 교무

[원불교신문=방길튼 교무] <개교의 동기>의 ‘파란고해’는 정신의 세력이 쇠약해져서 물질의 세력에 지배를 받는 물질의 노예생활이라면, ‘광대무량한 낙원’은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여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물질을 선용하는 생활이다. 즉 파란고해는 하나로 두렷한 일원상 자리가 어두워져서 정신이 물질에 끌려 다니는 상태라면, 광대무량한 낙원은 하나로 두렷한 일원상이 발현되어 정신이 물질을 선용하는 경지다.

일원상이 발현된 정신의 세력을 확장할 때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선용할 수 있는 것이며, 그러할 때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되는 것이다. 이처럼 광대무량한 낙원은 일원상이 드러난 정신의 세력이 물질의 세력을 잘 운용하는 개인이요 가정이요 사회요 국가요 세계로써, 광대한 낙원은 ‘어디나 낙원’이라면 무량한 낙원은 ‘언제나 낙원’인 것이다. 

일원상은 한 자리(一)이기에 이것저것으로 분별되어 잡념으로 섞일 수 없는 텅 비어 고요한 자리이며, 일원상은 두렷한 자리(圓)이기에 만상 그대로 역력하게 드러나는 신령한 자리이다. 그러므로 일원상 이 자리에 들면 걸리고 막힘이 없는 광대한 자리가 드러나고, 한정될 것이 없는 무량한 자리가 드러나는 것이다. 정신의 세력이 확장된다는 것은 광대하고 무량한 일원상 자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광대무량한 낙원은 일원상에 바탕한 낙원이다. 하나로 두렷한 일원상에 들면 하나이기에 분별망상이 어찌할 수 없고, 두렷하기에 분명망상마저도 눈앞에 청정하게 드러나 숨을 곳이 없게 된다. 이와같이 하나로 두렷한 일원상이 발현된 정신의 세력이 확장되면 물질의 세력에 끌리고 안 끌리는 여부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이처럼 광대무량한 낙원은 정신과 물질이 정위(正位)하는 낙원으로 정신을 주체로 물질을 잘 사용하여 정신문명과 물질문명이 병진되는 세상이다.여기서 주의해서 살펴볼 것은 광대무량한 낙원은 고의 반대로써 낙이 아니라 고락을 초월한 극락자리(<대종경> 성리품 3장)에 기반한 낙원이라는 것이다.

고락을 초월한 극락자리는 고락 경계에서 고락에 매몰되지 않는 자리이다. 그러기에 고락 경계를 신령하게 알아차리는 고락초월의 일원상 자리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낙원으로 인도될 수 없는 것이다. 낙인 줄 알아차릴 때 낙에 빠져 타락하지 않고 낙을 누릴 수 있으며, 고인 줄 알 때 고에 빠지지 않고 고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광대무량한 낙원은 고락이 상반되는 물질문명 속에서 고락을 알아차리는 신령한 일원상 자리에 바탕하여 정당한 고락으로 한결같이 지내며 부정당한 고락은 영원히 오지 않도록 하는(<정전> 고락에 대한 법문) 정신의 세력이 확장된 경지이다.

결국 광대무량한 낙원은 고락의 경계 속에서 고락을 초탈(超脫)한 일원상에 바탕하여 정신의 세력을 확장하고 물질의 세력을 항복받아 선용하는 물심양면의 참 문명세계이다.(<대종경> 교의품 30장) 즉 일원상이 발현된 정신의 세력으로 물질문명의 고락을 잘 운용하는 개인·가정·사회·국가·세계이다.

/나주교당

[2019년 12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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