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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문답] “정당한 낙樂을 얻기 위한 고苦, 즐겁게 수용하는 것이 해탈”
[교리문답] “정당한 낙樂을 얻기 위한 고苦, 즐겁게 수용하는 것이 해탈”
  • 유원경 기자
  • 승인 2020.02.11
  • 호수 197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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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산 이정택 원로교무, 고락에 대한 법문 1
[원불교신문=유원경 기자] 소태산 대종사는 ‘고락에 대한 법문’을 통해 정당한 고락으로 무궁한 세월을 한결같이 지내자고 법문했다. 낙(樂)만을 취하려하지 말고 정당하다면 고(苦) 역시 취하라 하신 말씀이며, 부정당한 고락이 오지 않도록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기를 주의하자는 뜻을 담아 공부길을 밝혔다. 이번 교리문답에서는 정당한 고락이 무엇이며, 정당하지만 싫어하는 고를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에 대해 중앙남자원로수양원 전산 이정택 원로교무를 모시고 문답했다. 고락에 대한 법문을 주제로 2회에 걸쳐 연재된다.

 

전산 이정택 원로교무

정당한 고를 수용하는 방법은 어떤 것이며, 반야심경의 ‘공을 비추어 일체고액을 건너는 공부’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람은 누구나 살아가면서 괴롭고 즐거운 일을 겪게 되는데 이는 반드시 원인이 있어서 겪는 것이고 결코 우연한 것은 없으므로 고락의 원인을 알아 잘 수용하라는 법문이다. 정당한 고라고 하는 것은 고가 변하여 낙이 되는 고를 정당한 고라 하는데, 영원한 낙을 장만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겪게 되는 고통을 이야기 한다. 예를 들어 성불하기 위해 갖가지 수행을 행할 때 밀려오는 고통이나 업력을 소멸시키기 위해 겪게 되는 괴로움을 정당한 고라 할 수 있다. 정당한 낙을 얻기 위한 정당한 고통은 조금은 어려움을 겪을지라도 이를 즐겁게 수용해야 한다. 이것이 해탈의 공부이기도 하다.

반야심경에서 말씀하신 오온(五蘊,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이 공한 자리는 내가 없는 무아(無我)의 자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공한 자리를 비춰보니 삶의 고통 즉 팔고(八苦)를 다 멸도 할 수 있다는 말씀이다. 인생의 괴로움이란 욕심으로부터 생기며, 욕심의 근원은 곧 나라는 집착에 있다. 이 집착으로 인해 두려움과 고통이 생기는 것인데, 이 몸과 마음이 공한 그 자리를 관하고 깨쳐 체득하면 무아가 된다. 일체망념이 생겨날 때 무아의 자리에 비춰 녹여버리면 자연스럽게 고와 낙을 초월할 수 있는 것이다.


우연한 고와 우연한 낙에 대해 설명해주고, 영원한 고와 영원한 낙은 어떤 것인가
우연한 고락이란, 생각지 못한 경계에서 오는 고락을 말한다. 그 원인을 짐작할 수 없는 고락이기에 우연한 고락이라 표현한 것이며, 이는 전생에 지은 것이거나 무심으로 모르는 가운데 지어놓은 결과라 할 수 있다. 살다보면 정말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많다. 아무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비난을 받기도 하고 화를 입기도 한다. 또는 열심히 노력했으나 그 결과가 좋지 않기도 한다. 반대로 모든 일들이 갑자기 잘 풀려 횡재를 보기도 한다. 이 모두를 일러 우연한 고락이라 표현했으나, 세상일들은 알고 보면 짓지 않고 받는 고락은 없다.

영원한 고라는 것은 현재 하는 일도 괴롭고 장래의 결과도 괴로운 것으로 영원히 괴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한 경우를 말한다. 생활 속에서 경계를 맞게 될 때 상극으로 대처해 고통에서 헤매는 중생의 생활이라 말할 수 있다. 이는 고락의 원인을 모르고 역경에서 낙망해 타락하며 더욱 죄업을 짓는 강급 생활의 고통이라 할 수 있다. 영원한 낙이라는 것은 현재도 미래도 즐거운 것으로 이는 고락의 원인을 깨달아 법 있게 누리는 불보살들의 낙생활이라 할 수 있다. 모든 경계에서 항상 상생의 관계로 일을 처리하며, 순경에 처할 지라도 과욕과 넘침이 없이 선업을 짓는 공부인의 생활이라 할 수 있다.
 

고락 원인을 깨달아 법 있는 불보살들의 낙생활을 누려야
낙원건설, 도학·과학 병진한 일생의 신낙원, 영생의 심낙원
감수불보 선업결연 하는 심경, 은혜로 돌리는 취사 돼야

고락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공부는 
눈앞에 닥친 괴로운 고와 즐거운 낙이 모두 우연한 것이 아니라 반드시 원인이 있으며, 지금 받고 있는 고락은 다시 또다른 고락을 불러옴을 알아서 고락의 근원을 다스려야 한다. 소태산 대종사는 정전 참회문을 통해 죄업의 근본이 탐·진·치임을 밝혀줬다. 이 삼독심의 주체는 내게 있는 것이다. 전생과 금생을 통해 내가 짓고 내가 받게 되는 것이 고락이라는 결과로 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내가 짓는 한 생각이 상극으로 작용하면 고의 씨가 되는 것이며, 한 생각이 상생으로 작용하면 낙의 씨가 되는 것이다. 때문에 행주좌와 어묵동정간에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를 잘해 내게 닥친 괴로움이 후일에는 낙으로 변하게 하며 즐거움이 계속해 미래에도 낙으로 올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매사 감수불보 선업결연 하는 심경으로 모든 괴로움이 스스로 지은 것임을 깨닫고 은혜로 돌려가는 취사가 돼야한다. 처음에는 인고(忍苦)의 자세로 억지로라도 참아내며, 두 번째는 안고(安苦)로 이 세상은 모두가 은혜의 관계로 맺어져 있음을 깨닫는 공부로, 세 번째는 낙고(樂苦)의 단계로 전생 빚을 갚으니 개운하고 즐거운 심경으로 대처하는 공부가 있다. 항상 일원상의 진리가 은현자재 하는 것처럼 고와 낙이라는 것도 은현자재 함을 알아 생활하게 될 때 고와 낙에서 해탈을 얻는 것이다.


과거 선지식들은 인간락은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수행이란 재색명리를 떠나서 무소유의  마음으로  살아야  하는 것인가
소태산 대종사는 교의품 33장을 통해 부처님은 모든 출가 수행자에게 잘 입으려는 것, 잘 먹으려는 것, 좋은 거처를 찾는 세간 낙을 엄중히 말리며, 오직 심신을 적적하게 만드는 것으로만 낙을 삼으라 했다고 밝혔다. 과거 공부인들은 대체적으로 금욕주의적인 수행이었다고 지적하면서, 원불교 수행은 정당한 일을 부지런히 하면서 수행을 하도록 권장해 분수에 맞게 의식주도 수용하도록 했다. 사람의 욕심을 없애서 본능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좋은 방향으로 자연스럽게 신장시키는 수행을 강조한 것이다. 또한 대종사는 형상 없는 천상락을 수용하다보면 자연스럽게 인간락도 아울러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대종사가 말씀한 광대무량한 낙원이란 어떤 세상이며,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는 어떤 종교인가?
대종경선외록 주세불지장 7절에서 “세상에 낙원이 두 가지 있으니 하나는 외형의 낙원이요 둘은 내면의 낙원이다. 외형의 낙원은 과학이 발달되는 머리에 세상에 좋아지는 것이요, 내면의 낙원은 도학이 발달되어 사람사람이 마음낙원으로 생활하게 되는 것이다. 과거 요순시대에는 내면의 낙원은 되었으나 외형의 낙원이 없었고, 현세에는 외형의 낙원은 되었으나 내면의 낙원이 적으니 우리는 내외 겸전한 좋은 낙원을 건설하기 위해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고 한 것이다”라고 말씀했다.

또한 교의품 31장을 통해 안으로 정신문명을 촉진해 도학을 발전시키고 밖으로 물질문명을 촉진해 과학을 발전시켜야 영육이 쌍전하고 내외가 겸전해 결함 없는 세상이 된다고 말씀했다. 내외 문명이 병진 되는 시대라야 비로소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가 될 것이며, 내외문명이 병진된 세상이라야 광대무량한 낙원의 모습일 것이다. 도덕이 없는 과학은 전쟁의 화구(禍口)를 면하기 어렵고, 과학이 없는 도덕은 빈궁의 세계를 면하기가 어렵다. 결국 낙원건설이란 도덕과 과학을 병진해 일생의 신낙원(身樂園)과 영생의 심낙원(心樂園)을 건설해 다 같이 잘살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광대하고 원만한 종교의 신자가 되는 길이란 신앙과 수행을 해 나갈 때 대종사가 제시한 병진과 쌍전, 병행의 정신을 잊지 말고, 선후본말과 주종관계를 잘 알아서 이무애(理無碍) 사무애(事無碍)의 심법으로 모든 것을 잘 수용해 활용하는 자세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2020년 2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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