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8월 16일 평양 광법사에서 열린 남북해외불교·원불교합동법회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행사는 원불교 대표가 참석한 첫 남북합동법회였고, 2005년 6월 ‘남북불교·원불교 합동법회’(광법사)로 이어졌다.
2001년 8월 16일 평양 광법사에서 열린 남북해외불교·원불교합동법회를 마치고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이 행사는 원불교 대표가 참석한 첫 남북합동법회였고, 2005년 6월 ‘남북불교·원불교 합동법회’(광법사)로 이어졌다.

[원불교신문=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한국에는 다양한 종교가 공존하고 있다. 같은 종교라도 다른 종교를 바라보는 시선은 엇갈린다. 특히 개신교의 경우 교파별로 인식차이가 상당하다. 이러한 다양성 속으로 북한사회와 남북종교 교류문제를 끌어들일 경우 하나의 인식과 방향으로 접점을 찾기란 사실상 어렵다. 철저한 반공반북 인식에 기초해 북한정권을 무너뜨려야만 북한 ‘인민’을 구원할 수 있다는 시각부터 우선 남과 북의 다름을 인정하고 만남과 교류를 통해 단계적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시각까지 그 스펙트럼이 굉장히 넓기 때문이다. 


종교교류에 나온 것 자체가 변화의 단초
남과 북은 75년을 떨어져 살았다. 당연히 세대가 바뀜에 따라 남과 북의 사고와 생활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변화됐다. 북한에서는 과거 종교와 신앙의 경험을 가진 세대가 사라졌다. 전후 세대, 특히 60년대 이후 출생한 세대에게는 주체사상 자체가 ‘믿음’이고 ‘종교’였다. 

또한 북한 사람들은 해방 후 ‘자본주의’ 자체를 경험한 적이 없다. 베트남의 경우 1970년대 사회주의 북베트남(‘월맹’)에 자본주의 남베트남(‘월남’)이 흡수됐지만 1990년대 개혁개방 때는 남베트남의 자본주의 경험이 큰 자산으로 활용됐다. 그에 비해 북한은 1990년 전후 사회주의권이 붕괴, 해체되고 개혁개방될 때까지만 해도 자본주의 생활과 문화에 접할 기회가 없었다. 자본주의와 남한은 ‘혁명의 대상’이었지 공존과 교류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런 북한이 1991년 남북기본합의서 전후로 해서 대화와 협력을 이야기하기 시작하고, 최근에 들어와서는 ‘세계화 추세’ 수용과 ‘경제개혁’을 불가피한 과정으로 강조하고 있다. 2018년 9월 남쪽의 대통령이 10만 명의 평양 시민들 앞에서 직접 연설한 장면은 북한의 변화 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줬다. 2000년 6월 첫 남북정상회담이후 3차례의 정상회담이 이어진 결과로 가능한 ‘사건’이었다. 

남북 종교교류로 한정해서 보더라도 1980년대에 들어와 일부 종교인들이 해외나 국제회의에서 우연히, 발표자로 조우하는 단순한 만남형태로 시작됐지만 1990년대 후반 이후 대북인도적 지원과 민간교류로 이어졌고, 남북 공동불사, 북한 교회 개보수 지원, 공동 미사와 법회 등으로 발전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 북한 ‘인민’에게 종교를 전파하고자 하는 남쪽 종교인에게는 더디고, 불만스러운 속도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그동안 북한사회에서 종교가 인민 대중에게 제대로 인식되지 못한 상황”에서 “남북 종교인이 만나 합동 행사를 치를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우리 북쪽 사회를 놓고 볼 때 큰 사변이나 마찬가지”였다. 
결국 지난 75년의 역사적 경험과 교훈은 만남과 교류를 통해 형성된 신뢰가 서로를 변화시키고 소통의 폭을 넓힐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남북의 만남과 교류의 첫걸음은 서로의 ‘다름’에 대한 이해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자세로 단계적 접근 필요
남과 북은 삶의 정서면에서 비슷한 측면이 아직 남아 있지만 사회의 운영체계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이것은 단순히 북한 권력층을 무너뜨린다고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따라서 북한사람과 만나 대화하고 교류하기 위해서는 우선 객관적이고 종합적인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진면목(眞面目)’이란 말이 있다. 송나라시대의 시인 소동파가 천하절경으로 이름난 중국 장시(江西)성의 루산(廬山)을 둘러본 후 남긴 칠언절구(七言絶句)에서 유래한 말이다.

“橫看成嶺側成峰(횡간성령측성봉) /遠近高低各不同(원근고저각부동)/ 不識廬山眞面目(불식여산진면목)/ 只緣身在此山中 (지연신재차산중)”

“이리 보면 고개요 저리 보면 봉우리라/ 원근고저 보이는 건 모두가 다르구나/ 여산의 참모습은 알기가 어려워라/ 내 몸이 이 산중에 들어 있기 때문이리.”

조선시대 실학자 추사 김정희는 이 시를 “바라보는 위치와 시각에 따라 바뀌는 산의 모습을 보고 지식과 경험에 의존하는 인간의 어떠한 인식도 결코 사물의 실상과 본질을 올바르게 파악할 수 없다는 진리를 말한 것”이라고 해석했다. 

실상과 본질을 깨닫기 위해서는 산처럼 첩첩한 자신의 선입견과 주관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북한사회와 ‘인민’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과 냉전, 적대관계에서 형성된 선입견과 편견을 경계해야 하고, 보수든 진보든 현실과 동떨어진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역시 남과 북이 만나 대화하고 교류하는 것이다. 남과 북의 사람들이 오고가는 ‘소통의 장’을 마련해야 서로 신뢰가 생기고, 현실적인 대안이 생긴다. 우공이산(愚公移山:우공이 산을 옮긴다는 뜻으로, 어떤 일이든 끊임없이 노력하면 반드시 이뤄짐을 이르는 말)이라고 했다. 한 번의 만남으로 75년간의 다른 삶을 극복할 수 없겠지만, 자주 만나다보면 ‘소통’이 이뤄지고 ‘다름’을 넘어 ‘같음’을 넓혀나갈 수 있을 것이다. 
 

2011년 9월 22일 김주원 원불교 교정원장 등 남쪽의 7대 종단 대표들이 방북해 당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2011년 9월 22일 김주원 원불교 교정원장 등 남쪽의 7대 종단 대표들이 방북해 당시 김영남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면담한 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평화에 기여하는 종교교류와 선교
우리의 기본목표는 한반도 평화이다. 한반도를 비핵화지역으로 만들고 안정적인 평화체제를 구축하면서 전쟁이 아니라 대화와 협력을 통해 장기적으로 통일을 이룩하는 것이다. 이것은 장기적인 과정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과정에 만남과 교류를 통한 소통이 필요하다. 그리고 남북의 소통과정은 북한 스스로 현재 추구하고 있는 경제개혁과 변화의 폭을 넓히고, 국제사회와의 협력공간에 나올 수 있도록 촉진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이를 통해 북한이 중국과의 협력이 아닌 한국과의 협력모델을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과거 경험을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아야 한다. 1998년 금강산관광 뱃길이 열린 지 5년만인 2003년 육로관광이 시작돼 매년 20~30만명의 관광객이 금강산을 방문했고, 그해 서울과 평양을 잇는 순수관광 목적의 하늘길도 처음으로 열렸다. 그리고 2005년 1만여 명의 남쪽 사람들이 ‘아리랑’ 공연을 보기 위해 평양을 방문하기도 했다. 2007년 12월에는 개성 육로관광이 열려 2008년 11월 중단될 때까지 11만명이 다녀왔다. 이러한 만남은 ‘북한 퍼주기’가 아니라 서로를 이해하는 과정이었고, 특히 북한 사람들에게 더 큰  ‘충격’과 ‘영향’을 줬다고 본다. 

그러나 이명박, 박근혜 정부시절 남북관계가 단절되고 개성공단마저 폐쇄되면서 많은 북한의 노동자들이 중국과 러시아, 중동지역에 나가 일을 하면서 자본주의사회와 접촉했다. 북한이 자주와 자력갱생을 강조하지만 중국의 경제적 영향력은 커지고 있다. 그에 반해 남한에 대한 신뢰와 의존도는 낮아졌다. 

다행스럽게도 2018년 ‘4·27판문점선언’에서 남과 북은 “민족적 화해와 단합의 분위기를 고조시켜 나가기 위하여 각계각층의 다방면적인 협력과 교류 왕래와 접촉을 활성화하기로 했다”라고 합의했다. 단절을 넘어 평화를 위해 다시 만남과 교류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다. 

남북종교 교류와 선교도 마찬가지다. 변화하는 북한사회를 새롭게 인식하고, 이에 기초해 천천히 한 걸음씩 내딛는 종합적 대북포용전략을 다시 짜야 할 때다. 

■ 약력
ㆍ현 평화경제연구소장
ㆍ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ㆍ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ㆍ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ㆍ(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ㆍ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ㆍ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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