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산 이성택 원로교무

시대의 모든 현상들 교법이념으로 해석해 내야
중근병은 자기의 알음알이에 만족하고 정체돼 있는 것
대종사 변산 5년의 대정, 교강발표 등 대동의 준비기

“견성 못 한 이는 항마위에 오를 수 없다”라고  『대종경』에 명확하게 나오는데, 법강항마위의 승급조항에는 견성에 대한 언급이 없다 
법강항마위의 승급조항에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다”라고 돼 있다. 그것이 견성이다.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는 것 자체가 견성의 단계라서 견성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다. 견성한 이의 연구력을 구체적으로 밝힌 내용이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다”라는 말씀이다. 견성보다도 더 구체화 된 것이다. 

이치 자리는 사리연구에서, 이(理) 가 곧 천조의 대소유무이기 때문에 이 자리에 통달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다. 그래야지만 법강항마가 되는 것이다. 

그렇기에 항마위에 오르려는 사람의 목표가 대소유무에 걸림이 없는 그 자리를 목표해야 한다.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필요한 공부가 있을 것 아닌가, 그 필요한 공부를 과정화 해야 한다. 그것이 법위 단계별 훈련이다. 훈련의 체계적인 과정화를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과정화 한 훈련의 결과를 또한 평가해야 한다. 현재 우리는 법위 사정하는 도구가 미흡하다. 법위등급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훈련시킬 것인가.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야 되고, 거기에 입각해 평가 도구를 마련해 내야 한다. 그래야 법위등급이 완성되는 것이다.


법강항마위에서 출가위에 오르는 동안에도 중근의 고비가 있다고 했는데, 항마위의 중근고비는 어떻게 넘겨야 되는가 
사람에게 세 가지 근기가 있다고 했다. 그 중 하근기는 신해(信解)의 단계로 믿어서 아는 근기이다. 대종사의 법이라 하면 무조건 다 믿어버리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중근기가 있다. 우리가 중근기라고 하면 흔히 좋지 않은 분별성의 중근기를 말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하근기 위의 중근기를 생각해봐야 한다. 그 중근기는 알음알이로 해오(解悟)로 되어 가는 것이다. 그 중간을 지나 다음에는 상근으로 가는데, 그 상근기는 증오(證悟), 증득해서 아는 단계이다. 

하근기는 신해 , 중근기는 해오, 상근기는 증오, 이 세근기를 우리가 다 보편적으로 알아야한다. 그래야 중근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질문한 중근기라는 것은 공부단계에서 나타난 중근기의 경계해야 할 점을 이르는 것이다. 

중근기는 해오 즉, 배워서 알아가는 단계라 했다. 배워 알아가는 과정에 자만하는 것이다. 자기의 알음알이에 자만하는 것, 그것은 정체되는 것이다. 자만이 뭐냐, 자기의 알음알이에 만족하고 거기에 정체되어 있는 것이다. 관념의 테두리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니 계속해서 끊임없이 학습하고, 빠르게 변해가는 세상에 맞춰 계속해서 학습하며 진화해야 한다. 세상은 엄청난 속도로 달려가고 있다. 이 현상들을 우리 교법의 이념들로 해석해 내야 된다.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한다” 라는 말씀을 해의하면
항마위의 승급조항에 “대소유무의 이치에 걸림이 없다”라고 말씀했다. 사리 연구의 리(理), 이치를 분석할 때, 대소유무를 분석하는데, 그것을 아는 것이 견성이다. 우리가 견성을 하고 이치를 알고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나.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알아서 시비이해를 밝혀 사람의 생활과 심신작용에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대소유무의 이치가 시비이해로 건설이 되지 않으면 그것은 죽은 대소유무의 이치다.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아무 소용이 없다. 그것을 시비이해로 건설해서 활용해야 된다. 대소유무의 이치는 곳간의 가두어둔 보물과 마찬가지다. 그 보물을 가져다가 써야 된다. 갖다놓기만 하면 뭐 하겠는가 쓰는 사람이 임자다. 그래서 대소유무의 이치를 보아다가 시비이해를 건설 한다 이렇게 표현하신 것이다. 

대종사의 법을 개벽의 새로운 시대에 맞게 활용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비이해를 건설하는 것이며, 시대의 흐름을 우리가 주도해 나가는 것이다.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야 되는지를 주도해 나가는 것이 시비이해를 건설한다는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 현상이 왔다. 동포은의 자리이타의 말씀, 강자약자 진화상 요법, 우리교법이 세상에 내 놓을 수 있는 답 아니겠나. 대소유무의 이치를 따라 인간의 시비이해를 건설하는 예일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흐름에 관점을 두지 않으면, 우리 교법을 시비이해로 건설할 수가 없다. 나는 그것을 강조하고 싶다. 시대에 일어나는 모든 현상들을 우리 교법이념으로 해석해 내야 한다. 이 역할을 우리가 해야 된다.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고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라는 말씀은
동하여도 분별에 착이 없는 것은 대체로 누구라도 할 수 있다고 대산종사가 말씀했다. 하지만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 것은 여래의 책거리라고 했다. 여래를 토를 떼는 것이다. 

대종사는 부안 변산에서 5년간 대정(大靜)을 했다. 학명 선사도 그 뜻을 알지 못했다. 학명선사가 대종사에게 보낸 시가 있지 않는가. “투천산절정(透天山絶頂)이여 귀해수성파(歸海水成波)로다 불각회신로(不覺回身路)하여 석두의작가(石頭倚作家)로다. 하늘을 뚫는 절정이여 바다에 가서 파도를 일으키라. 몸 둘 길을 몰라서 석두에 의지해서 집을 짓고 있네.” ‘뛰어난 역량이 있는 사람이 바다에 나가서 파도를 일으켜야지 왜 석두암에 머물러 있느냐’ 이런 뜻이다. 

대종사가 답시를 보냈다. “절정천진수(絶頂天眞秀)요 대해천진파(大海天眞波)로다 부각회신로(復覺回身路)하니 고로석두가(高露石頭家)로다. 절정도 천진 그대로 빼어남이요 대해도 천진 그대로의 파도로다. 다시 몸 돌이킬 길을 깨달으니 높이 석두가에 드러났도다. 학명선사도 대종사가 석두암에 머문 뜻을 몰랐다. 대정에 들어서 대동을 준비했던 것이다. 분별이 절도에 맞은 예다. 대종사는 교법의 이념, 교강 발표를 실상 초당에서 했다. 익산 총부를 원기9년에 건설하기 위한 준비 작업을 변산에서 5년간 한 것이다. 5년간의 정은 대동을 준비한 대정의 기간이었다. 그러니 여래의 책거리이다. 

정하여도 분별이 절도에 맞는다는 것은 최고의 경지이다. 그 정이 동을 떠나지 않고도 절도 있게 분별을 다 하는 것이다. 정 속에서 동을 다 하는 것. 동정일여(動靜一如)가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다. 동 가운데 정이 있고 정 가운데 동의 준비가 있는 것이 동정일여다. 우리는 관념으로 그것을 동정일여라고 하는데, 대정의 가운데 대동의 준비가 있는 여래의 경지다.

[2020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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