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은 교무
임진은 교무

[원불교신문=임진은 교무] 언젠가 한 후배 교무와 있었던 일이다. 모임이 끝난 후 사람들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을 하는 중이었다. 삼삼오오 흩어져서 걷고 있는데, 나에게 뭔가 말을 하던 후배 교무를 내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모양이다. 몇 발 앞서 걷던 다른 교무에게 말을 걸려던 찰나, 그 후배 교무가 다가와서 말했다. “교무님, 제가 말을 하고 있는데 왜 그냥 가세요” 순간 깜짝 놀라서 “아, 미안해요. 몰랐어요”라고 했다. 지나고 보니, 사소한 일이긴 하지만 상황 그대로를 투명하게 말해준 후배 교무의 태도가 반갑게 느껴졌다. 

살다 보면 크고 작은 오해들이 생기곤 한다. 그러나 조금 들여다보면, 서로에게 서운함을 갖는 발단은 대단한 것이 아닐 때가 많다. 만약 곧바로 상황을 묻고 설명할 수 있다면 그로 인해 겹겹이 쌓이는 마음들이 좀 덜할 텐데, 자기 생각대로 짐작하고 판단하게 되면 사실과 멀어지게 된다. 물론 순간적으로 작용하는 그런 생각들을 인식해서 아는 것 자체가  어려운 일이긴 하다. 생각이 너무나도 빠르게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내가 어떤 감정을 느끼거나 반응을 보이는 것은 그렇게 만든 ‘사건’ 때문이라고 믿기 쉽다. 예를 들어, 직장 복도에서 마주친 사무실 동료가 인사를 하지 않고 지나가면 속으로 살짝 당황스러우면서 왠지 모를 불쾌감이 느껴질 수 있다. 그러면 사람들은 동료가 나에게 인사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마음에 불쾌감이 생겼다고 여긴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동료가 인사를 하지 않은 ‘사건’과 불쾌감이라는 ‘감정’ 사이에는 그 사람의 ‘생각’, 즉 그 사건을 해석한 관점이 있다. 사람들은 상황을 해석한 자신의 ‘생각’에 따라서, 똑같은 일을 겪고도 서로 다른 감정과 행동을 보이게 되는 것이다. 만약 동료의 그 행동을 보면서 ‘뭐, 급한 일이 있나?’라고 생각되면 감정적으로 별다른 동요가 없겠지만, ‘혹시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니야?’라고 생각되면 은근히 괘씸해진다. 

우리가 가진 생각에는 층이 있다. 가장 아래층에는 ‘신념’이라는 것이 굳게 자리 잡고 있는데, 이 신념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에 따라서 어떤 사건을 만났을 때 순간적으로 튀어나오는 생각들이 건강하고 합리적인지 그렇지 못한지가 결정된다. 만약 비합리적인 신념을 갖고 있다면, 평소의 생각들은 마치 파편이 퍼지듯 자연히 부정적이고 왜곡된 방향으로 작용한다.

비합리적인 신념은 예를 들면 ‘나는 나를 아는 모두에게서 사랑과 인정을 받아야 한다’와 같은 것이다.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서 비합리적인데, 만약 이런 신념을 갖고 있으면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거부나 거절이 너무 두렵기 때문에 이런 신호에 엄청나게 민감해진다. 약간의 부정적인 표현에도 이를 거부나 거절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상대방으로서는 참 난감할 일이다.

신념은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어서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신념을 알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은 평소 어떤 상황을 대했을 때 즉시적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을 면밀하게 ‘알아차리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들을 모아보면, 내가 내면에 갖고 있는 신념의 패턴을 찾을 수 있다. 만약 그 내용이 자신, 타인, 세상에 대해 ‘반드시 ~해야 한다’라고 너무 경직되어 있거나, 현실적이지 않거나, 자신이나 타인의 가치를 비하하는 것이라면 건강하고 합리적이라고 할 수 없다. 나의 신념, 그리고 생각들은 어떠한가? 과연 안녕한지, 점검해보자. 

 /원광대학교

※ 다음주부터는 류성태 교무의 ‘개혁정신과 원불교’가 연재됩니다.

[2020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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