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청봉악단이 공연하고 있다. 청봉악단 소속 가수 김주향은 2000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노래를 부른 적이 있고, 삼지연관한악단의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왼쪽에서 3번째).
2015년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70주년을 맞아 청봉악단이 공연하고 있다. 청봉악단 소속 가수 김주향은 2000년 평양학생소년예술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와 노래를 부른 적이 있고, 삼지연관한악단의 가수로도 활동하고 있다(왼쪽에서 3번째).

음악으로 사회적 가치 선전
2018년 2월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의 삼지연관현악단이 방남해 서울과 강릉에서  ‘달려가자 미래로’, ‘백두와 하나는 내 조국’ ‘비둘기야 높이 날아라’ 등 북측의 대중가요를 불렀다. 그해 4월에는 남쪽의 가수들이 평양을 방문해 남측의 대중가요를 소개했다. 

북측은 이선희의 ‘J에게’를 비롯해 심수봉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등 남쪽의 노래도 불렀지만 ‘평화’와 ‘통일’의 메시지를 담은 노래를 선곡했고, 남측은 조용필, 최진희, 레드벨벳 등이 자신들의 히트곡을 불렀다. 이러한 공연내용은 노랫말의 사상성을 강조하는 북한과 개인의 감정을 중요시하는 남한의 음악문화 차이를 잘 보여준다. 북한에서 음악은 개인의 감상에 머물지 않고, 개인을 포함한 집단 교양과 선동 수단이고 문화정서를 높이는 수단으로 강조된다. 

음악으로 사회적 가치를 선전하고, 정치적 지향을 음악으로 표현한다. 이를 북한에서는 ‘음악정치’라고 말한다. 어떻게 보면 과거 박정희시대 때 ‘나의 조국’, ‘새마을 노래’ 등을 정부가 창작해 ‘국민가요’, ‘건전가요’로 보급했던 것도 일종의 ‘음악정치’였다. 

예로부터 유가(儒家)에서는 “예(禮)로써 백성의 마음을 절제하고 악(樂)으로써 백성의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정치로써 이것을 따르도록 하고 형벌로써 방지한다”며 정치에서 음악의 역할을 중요시했다. 

악(樂)의 중요성을 강조한 대표적인 사상가인 공자(孔子)는 “음악으로 민심을 올바르게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음악이 정치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며 “시(詩)·예(禮)·악(樂)을 군자의 필수 불가결한 요소”로 간주했다.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시대에도 예악정치를 역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큰 방책으로 일관되게 추구됐다. 
 

일찍부터 음악의 정치적 활용에 주목
북한에서 음악을 정치와 결합시켜 ‘음악정치’란 정치방식으로 체계화 한 것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었다. 그는 1960년대 후반 예술정책을 관장하는 노동당 선전선동부 과장 시절 기존의 평양가무단을 만수대예술단으로 개편하고 이 단체를 ‘본보기예술단체’로 육성하기 시작했다. 그는 ‘새 형의 음악’을 표방하며 “민족적 정서와 현대적 미감을 옳게 구현”할 것을 주문했다. 관현악단의 악기편성에서도 민족악기와 서양악기를 배합하는 파격이 이때부터 시도됐다.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1980년대에 들어와 후계자로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김 위원장은 “음악을 대중화하여야 한다”며 새로운 시도를 했다. 1983년의 왕재산경음악단과 1985년의 보천보전자악단의 결성이 그 출발점이었다.

1983년에 결성된 왕재산음악단은 북한 최초의 경음악단으로, 전속악단과 가수, 무용수로 구성됐다. 이 악단은 주로 민요풍의 노래를 불러 인기를 끌었다. 북한은 이를 두고 “전자악기와 양악기를 가지고도 민요를 얼마든지 우리 인민의 정서와 현대적 미감에 맞게 잘 형상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고 평가했다. 

2년 후인 1985년, 경음악단인 보천보경음악단(후에 보천보전자악단)이 결성됐다. 보천보전자악단은 엘리트 음악교육을 받은 뛰어난 연주가, 가수, 작곡가들로 구성됐고, 리듬보다는 가사를 중시하는 북한식 음악을 지향하면서 세계 각국의 대중음악도 연주했다. 연주 형태는 보통 전자악기를 중심으로 양악기와 전통악기를 혼용하며, 음악적 효과를 높이기 위해 전속 배우와 합창단을 두었다. 대표적인 가수로는 김광숙, 리경숙, 전혜영 등이 활동했다. 이들은 ‘휘파람’, ‘도시처녀 시집와요’ 등을 히트시키며 생활(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다.

왕재산경음악단과 보천보전자악단의 결성은 서구의 팝송이나 락음악의 침투에 대응하면서 변화된 청년세대들에게 새로운 형식의 음악을 보급하기 위한 시도였다. 이를 두고 북한에서는 “부르주아 음악예술의 침습을 막고 사회주의 음악예술을 건전하게 발전시키며 인민들의 높아 가는 문화생활의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근로자들의 다양한 정서를 반영한 노래를 많이 창작 보급”하기 위한 것으로 에둘러 표현했다. 

두 악단은 북한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당시로서는 이들 악단 가수와 무용수가 입은 의상 자체가 파격적이다. 평양의 식당이나 노래방, 해외 평양식당에서는 대부분 보천보전자악단의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런 점에서 1980년대 후반~2000년대 북한의 젊은 세대들은 왕재산음악단과 보천보전자악단의 음악을 향유하며 자란 세대라고 할 수 있다.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의 음악계는 다시 한 번 변화를 모색할 수밖에 없는 환경을 맞이했다. 국제교류가 늘어나고 남북의 상호 방문 공연이 이뤄진 것이다. 더구나 남쪽의 노래가 중국을 거쳐 ‘연변가요’란 이름으로 북쪽에서 폭넓게 불리기 시작했다. 특히 1990년대부터 남쪽 출신 인물을 다룬 <민족과 운명> 시리즈가 영화로 나오면서 영화에 삽입된 계몽기 가요와 일부 남쪽 노래가 해금됐다. 전도유망한 음악인의 해외유학도 활발해졌다. 민요풍의 노래를 주로 하는 왕재산경음악단, 20년이 흘러 전형화 된 보천보전자악단의 음악으로 중독성이 강한 남쪽이나 중국 노래의 유입을 막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과거의 역사를 담은 ‘혁명가요’로는 더 이상 젊은 세대의 변화된 감성을 담아낼 수 없는 시대가 된 것이다.
 

신세대와 세계적 추세 수용 ‘열린 음악정치’ 표방
이러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북한은 ‘인민 정서’와 ‘세계적 추세’를 내세우며 보천보전자악단을 해체하고 모란봉악단을 창단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젊은이들이 만끽할 수 있는 공연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2012년 7월 6일 18명의 여성으로 구성된 모란봉악단의 시범공연은 “젊은 가수들이 곡상의 요구를 훌륭히 구현해 노래를 정서적이고 흥취나게 불러 무대를 시종 격정과 환희로 달구었다”고 평가를 받았고, 이후 조선중앙TV와 조선중앙방송 등 북한 방송매체는 온통 모란봉악단의 노래로 채워졌다. 

이후 북한은 왕재산경음악단을 왕재산예술단과 청봉악단으로 개편하고, 2017년 은하수관현악단(2014년 해체)을 중심으로 청봉악단, 조선국립교향악단, 국가공훈합창단, 만수대예술단 등에서 선발된 연주자와 가수, 무용수로 구성된 삼지연관현악단을 새로 결성했다. 

정치적으로 보면 모란봉악단과 삼지연관현악단의 결성은 김정일시대의 ‘음악정치’를 김정은시대에 계승 발전시키려는 의도가 깔려있다. 2011년 김정은 위원장은 “음악의 사명은 사람들을 정서적으로 감동시키고 그들의 사상과 정신을 발동하여 혁명투쟁으로 고무 추동하는 데 있다”라고 규정했다. 이것은 “노래와 정치를 결합시킨” 김정일 위원장의 음악정치를 계승하겠다는 발언이었다. 

북한은 김정은 위원장의 ‘음악 행보’를 김정일시대 ‘음악정치’와 구별해 ‘열린 음악정치’라고 명명했다. 여기서 ‘열린’은 “민족고유의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것과 함께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대담하게 받아들여 우리의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지향이 담겨 있다. 젊은 세대와의 공감과 세계적 추세 수용을 좀 더 강조한 셈이다.

■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20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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