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일원상 수행’은 일원상 진리를 표본삼아 표본 그대로 닦아 행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일원상 진리에 부합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 그 취지다. 그래야 인생의 지혜와 복락이 함께하는 삶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수행장의 첫머리에 ‘일원상 진리를 신앙하는 동시에’라고 전제하여 모름지기 수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새삼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점을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같다. 간혹 수행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진리에 믿음보다 자기 생각이나 체험을 앞세우는 경우를 볼 때 안타까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설혹 믿음을 앞세우고 잘 수행하는 중이라도 다소간의 진전과 체험을 얻게 되면 진리에 대한 믿음보다 자기 체험과 주견에 빠져 수행을 그르치는 경우가 없지 않은 것 같다. 견고한 믿음이 없이 수행의 온전한 공덕을 이룰 수 없음에 대하여 깊은 각성이 필요하다. 또 이 장의 문장 흐름을 살펴보면 ‘일원상 신앙’은 ‘일원상 진리’의 원문에다가 ‘믿으며’라는 말만 더해 진술하고 있음에 반하여 ‘일원상 수행’은 그 진술 방식이 전혀 다름을 볼 수 있다. 

물론 일원상 신앙이 일원상 진리 그대로 믿는 것처럼 일원상 수행 역시 일원상 진리 그대로 닦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만 수행이란 마음을 통해서 행하고 증득하는 것이므로 일원상 진리를 마음에 부합하도록 ‘원만구족(圓滿具足) 지공무사(至公無私)’로 쉽게 표준 잡아 주신 것이 아닌가 한다. 

우리 마음의 본체는 말과 글로 가히 표현할 수 없으나 그런 가운데 모든 것이 결함 없이 다 갖춘 완전한 모습이며 또한 그런 가운데 어느 한 편에 치우침 없이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한 수행에 발원하는 사람은 이와 같은 마음이 각자에게 이미 본래로부터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음을 원만하게 알자는 것이며, 그 마음을 아는 것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원만하게 기르자는 것이며, 알고 기르는 것에 머무를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서 원만하게 사용하자는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함으로써 일원상 진리와 우리의 삶이 하나가 되게 하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곧 다름 아닌 견성(見性)·양성(養性)·솔성(率性)하는 삼학공부로써 일원상 수행의 강령이 된다. 일원상 진리의 진공(眞空)한 체성과 묘유(妙有)의 밝음과 조화(造化)의 작용을 우리의 한 몸에 그대로 체 받는 것이 곧 일원상 수행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말을 풀어놓고 보니 초입자들에게는 다소 어렵겠다는 느낌이 든다. 구경의 일원상 진리를 조심스럽게 설명하다 보니 그런 한계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절망할 이유는 없다. 일원상 수행의 원론이 그렇다는 것이고 대종사께서 천차만별 중생의 근기에 따라 수행할 수 있도록 다양한 방편을 펴주셨기 때문이다. 각자의 근기에 따라 공부할 수 있으면 그대로 족할 것 같다. 

보통급은 보통급 근기에 맞게, 특신급은 특신급 근기로, 법강항마위는 항마위대로, 출가위는 출가위대로 일원상 수행이 가능하도록 해주셨기 때문에 걱정할 일이 없다. 

여기에 따른 구체적인 수행 방법과 세목들에 대해서는 기회가 되면 ‘수행편’에서 상세하게 다룰 수 있을 것이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1월 22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