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오늘은 <일원상 법어>를 공부할 차례다. 일원상 진리, 신앙, 수행, 서원문을 거쳐 법어 차례에 이르렀다. 일원상 법어는 성불제중을 서원하고 진리공부에 발심한 사람이 잘 공부하여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합되는 행(行)의 표준을 제시해준 법문이다. 이른바 각행(覺行)의 표준이다. 나름 공부에 정진해 경지에 이르렀을 때 자신의 공부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가를 스스로 대조해 볼 수 있는 표준이자 거울이라고 할만하다. 누구든지 정진해 공부가 깊은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때 이 법어에 대조해보면 자신의 공부가 바른 길을 가고 있는지 아니면 그릇된 길을 가고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다. 참 친절하신 법문이다. 

요즘 SNS를 보면 자칭 도인들이 넘친다. 말세에 도인이 많이 나온다더니 깜짝 놀랄만한 내공을 가진 이들이 적지 않다. 참 반가운 일이다. 이처럼 암담한 시절에 속 깊은 공부인들의 출현이 많다는 것은 무척 다행한 일이지만 그러나 한편 과연 저 사람들이 무엇으로 도인이라고 칭하고 공부인이라고 자부할까? 의아심이 들 때가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실 깨달음에 대하여 참과 거짓의 여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이 고도의 정신세계와 관련한 것이고 매우 주관적이어서 자칫 독단에 흐를 수 있는 개연성이 많고, 종교 특유의 신비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사이비 논란이 계속돼 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신(神)을 참칭하거나 깨달음을 빙자한 폐해가 참으로 크다. 그래서 과거 불가에서도 깨달음 인증 여부가 문제가 돼왔다. 대중을 그릇 인도한 죄가 크다고 하지 않았는가? 종교의 문에서 이 문제가 투명해지지 않고는 그 시비가 끊일 날이 없을 것이다. 말 그대로 사이비란 말은 ‘흡사한데 아니다’는 말이니 여간 눈 밝은 이 아니면 그것을 어떻게 변별할 수 있겠는가? 
 
대종사는 “과거에는 인지가 어두운 세상이라 견성만 하면 곧 도인이라 하였으나 돌아오는 세상에는 견성만으로는 도인이라 할 수 없을 것”(성리품 23장)이라고 말씀 한 바 있다. 또 어느 스님과 격외의 선문답을 나누신 후 제자들에게 “앞으로는 이런 방식으로 견성인가를 하지 못한다”고 하신 말씀도 있다. 이런 이야기도 전해진다. 한 제자가 “금강산을 유람하는 중에 가마귀나 뱀을 임으로 부르기도 하고 보내기도 하는 사람을 보았는데 그가 참 도인이 아닌가 합니다” 하고 여쭙자 “가마귀는 가마귀와 떼를 짓고 뱀은 뱀과 유를 하나니 사람이 어찌 가마귀와 총중에 섞여 있으리오”하고 그러한 사람은 도인이 아니라고 했다. (인도품 59장)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표방한 원불교에서 일원상 법어가 갖는 의미는 각별하다고 생각된다. 과거 수많은 성자가 출현하였으나 이처럼 깨달음의 오묘한 경지를 간명하고 쉽게 표준 잡아준 경우가 드물다고 생각된다. 왜 우리가 대종사의 가르침을 대도정법이라고 하는지, 인지가 크게 개명되는 문명 세상에 종교의 모범이 되고 시대를 향도할 수 있는 정법인가를 이 <일원상 법어>만으로도 넘치게 증거 할 수 있다. 재가출가 남녀노소 유무식을 막론하고 누구나 서원만 있으면 쉽게 공부할 수 있도록 한 생활종교의 백미다. 서원을 세우고 정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시로 이 법어에 대조해 자신의 공부가 독단에 흐르지는 않는지, 편협하게 한쪽으로만 흐르지는 않는지 대조하고 대조할 일이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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