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한 도반이 말했다. “원불교는 다 좋은데 신앙이 좀 약한거 같아.” 두 눈이 동그래졌다. “뭐라고?”

신앙한다고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있다. 막 소리 내어 울면서 기도를 한다든지, 박수를 치고 몸을 흔들며 노래를 한다든지, 자기들이 믿는 신 혹은 사람만이 진리이고, 그들만이 계시 혹은 법을 받았다고 주장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신앙의 형태는 외부의 대상이나 특정한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했을 때 나오는 것들로, 충성을 바칠수록 집단 내에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남을 배척하고 과격해지기 쉽다.

원불교에서는 외부의 대상이나 특정한 사람을 신앙의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신앙의 방법도 당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 외적으로 보이는 행위를 상대적으로 비교하니 약해 보이는 것이지, 알고 보면 원불교 신앙만큼 위력 있고 무서운 것이 없다.

원불교에서는 법신불 일원상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한다. 일원상을 강연히 말하자면, 우리 마음이 청정한 상태, 두렷하고 고요한 상태,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상태를 말한다. 이 자리는 우주 만유의 본원이고, 모든 부처와 성인들의 깨달으신 바이며, 이미 불성이 있으나 아직 깨닫지 못한 중생들의 본래 마음자리다. 이 자리는 난 적이 없으니 멸하지 않아 불생불멸이고, 그러면서도 호리도 틀림없이 인과를 드러내,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이 하나로 드러나는 자리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교법의 총설’에서 이 자리를 신앙하고 수행의 표본으로 하라고 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신앙하고 수행하라는 말인가? 그래서 사은과 삼학으로 강령을 내어 놓았다. 

일원은 곧 사은이니, 사은의 은혜를 알아 보은행을 하는 것이 원불교 신앙의 방법이다. 보은하면 보은의 결과로 낙생활을 할 것이고, 배은하면 배은의 결과로 괴로운 생활을 할 것이다. 일원은 곧 삼학이니, 이 자리를 알아서 양성하고 사용한다. 일상생활이 수행이 돼 일원상을 여의지 않아 삼대력을 얻어 성불하고 주위에 은혜를 나툰다.

믿음, 즉 신(信)은 만사를 이루려 할 때에 마음을 정하는 원동력이라고 했다. 밥 먹는 것 하나도 먹겠다고 마음을 정하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 하물며 대종사와 같은 서원을 세운 우리는, 매 순간 육근을 작용하기 위해 마음을 정할 때, 일원상에 먼저 마음을 탁하고 정해야 한다.

믿음 중에서도 특별한 신심이란, 일원상에 마음을 정하는 힘의 정도가 우리가 육근으로 업을 지을 때나 생각을 할 때나 무엇을 믿을 때나, 정성을 들일 때 다른 곳에 흐르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인과 따라 그 마음에 좋고 싫음이 있고, 무수한 분별과 주착이 일어날진대, 이 마음이 일원상 외에 다른 곳에 흐르지 않는다면, 도대체 특신급은 어떠한 급일까. 갈 길이 멀지만, 길을 알기에 미소 짓고 다시 발걸음을 내딛는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3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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