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이미 수많은 종교들이 있었다.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는 거기에 또 하나의 종교를 더한다. ‘원불교’. 대종사는 왜 원불교를 열었을까. 그는 세상을 어떻게 진단했을까.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우리는 그가 제시한 해결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가.
 
‘개교의 동기’에서 대종사는 물질의 노예생활을 하는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기 위해 이 회상을 열었다고 했다.

나 정도면 괜찮은 줄 알았다. 나 정도 용금 받고, 나 정도 옷 안 사 입고, 나 정도 외식 안 하고, 나 정도 감정을 다스리려고 애쓰는 정도면, 이 정도면 물질의 노예까지는 아닌 줄 알았다. 그런데, 공부를 하면 할수록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나는 한 번도 물질의 노예가 아닌 적이 없었다.

핸드폰의 사진첩을 정리하면서 예쁜 사진들, 남기고 싶은 추억이 담긴 사진만 남기고 싶다. 좋은 것,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싶다. 내 의견에 동의하거나 칭찬하는 소리는 듣기 좋다. 철없는 소리, 이기적인 소리를 하면 딱 듣기 싫다. 맛있는 냄새, 길가 꽃향기는 좋지만, 길가의 쓰레기통에서 나는 냄새는 별로다. 맛있는 것을 먹거나, 하고 싶은 말을 할 때는 좋다. 쓰디쓴 약을 먹을 때는 힘이 들고, 감정이 걸러지지 않은 말을 뱉고 나서는 기분이 좋지 않다. 겨울에는 따뜻한 것이 좋고, 여름에는 시원한 것이 좋다. 생각이나 감정도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다. 제멋대로 왔다가 사라진다.

몸이라는 물질을 가지고 살아가는 모든 이가 육근이 좋아하면 좋아하고, 싫어하면 싫어하는 물질의 노예 생활을 하고 있다. 그 어느 누가 생로병사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남편은 아내 때문에, 아내는 남편 때문에, 부모는 자식 때문에, 자식은 부모 때문에, 친구 때문에, 연인 때문에, 상사 때문에, 직원 때문에, 선생 때문에, 학생 때문에, 사업 때문에…. 셀 수 없는 인연 관계 속에서 분별하고 집착하고 괴롭다. 그 어느 누가 인연 관계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가.

내가 몸 때문에, 인연 때문에 괴롭다면 내가 내 삶의 주인이 아니라, 노예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자각이 있을 때, 내 삶의 주인이 되고 자유를 찾기 위해 신앙을 하고 수행을 하려는 마음이 일어난다.

원불교법은 철저하게 ‘대승’이다. 대종사는 이 몸 하나 잘 먹이고, 잘 살기 위해 괴로운 세상을 벗어나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속에서 적극적으로 신앙하고 수행해 성불하자고, 우리 함께 낙원생활을 하자고 했다.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통해서 반드시 할 수 있다고 말이다.

내가 삶 속에서 얼마나 주인이 돼 자유로운지 생각해보자. 그리고 이 몸과 무수한 인연들이 없고서는 내가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면, 대종사와 같은 서원을 세우고, 그가 제시한 방법대로 신앙하고 수행해보자. 아무리 쉬운 것이라도 하지 않으면, 내 것이 아니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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