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게송은 가르침의 내용을 시문(時文)의 형식으로 압축한 노래다. 수행자가 깨달음을 시문으로 읊기도 하고 열반하면서 후래에 전할 내용을 전법(傳法) 게송으로 남기기도 한다. 이른바 오도송(悟道頌)이나 전법게송(傳法偈頌)등이다. 전통적으로 한문 형태이나 대종사님의 경우 새 시대 새 종교답게 친절하게도 한글로 전해주셨다.  

“유(有)는 무(無)로 무(無)는 유(有)로 돌고 돌아 지극하면 유(有)와 무(無)가 구공(俱空)이나 구공(俱空) 역시 구족(具足)이라.” 오늘 공부하는 게송은 정전 일원상진리의 가르침을 총체적으로 압축하고 있다. 정전 일원상진리 장이 개념과 논리를 빌어 진리의 세계를 설명한 경우라면 게송은 고도의 시어(詩語)로서 합축한 송(頌)이다. 물론 여기에는 오도(悟道)와 전법(傳法)의 의미가 다 담겨있으므로 진리의 진수(眞髓)다. 

대종사께서는 열반 두 해 남짓을 앞두고 이 게송을 공개적으로 내리셨다고 전해지고 있다. 과거 불가의 조사들이 열반 직전 몇몇 사람에게 은밀하게 전했던 관례에 비추어보면 파격이었다. 이게 우리 원불교 법통의 공전(公傳) 전통으로 자리잡았다.  

게송 원문에서 유(有)란 현상계를 의미한다. 생멸 변화하는 세계다. 무(無)는 유무(有無)를 넘어선 절대의 진리세계를 말한다. 불변하는 진리다. 돌고 돌아 지극(至極)하다는 것은 돌고 돌아 끝이 없다는 말이다. 그리하여 극(極)함도 넘어서는 지경에 이르면 구공(俱空)하게 되는데 이 또한 구족(具足)하다는 것이다. 역설 같지만 대반전이다. 여기서 구공(俱空)이란 유와 무가 원래 없는 진리인데 이 구공의 진리가 또한 구족(具足)한 진리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진공(眞空)과 묘유(妙有)는 하나다.  

게송은 심오한 진리를 몇 글자 이내로 압축하는 형식을 띄고 있어서 그 언어 상징 또한 고도화되어 있다. 그래서 해석의 여지가 많고 자칫 오해의 가능성도 열려있다고 보여진다. 그래서 이 게송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조심해야 할 것은 문자에 국집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흔히 무(無)를 유(有)의 반대되는 상대적 무(無)로 말하는 경우인데 이는 잘못된 해석이라고 본다. 이 무(無)의 진리는 생멸(生滅)을 넘어선 이른바 불생불멸의 체(体)다. 진여문(眞如門)이다. 강연히 무(無)라고 하였을 뿐, 유(有)라고 할 수도 없고 무(無)라고 할 수도 없는 자리가 바로 이 무(無)의 진리다. 성품(性品)의 진체(塵體)다. 이에 대한 오해가 풀리면 나머지 문제는 크게 구애될 것이 없다고 본다. 

대종사께서도 돌고 돈다, 지극(至極)하다 하였으나 이 또한 강연히 표현한 말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대종경』성리품 31장에 보면 대종사께서 게송을 내리고 친히 부연한 법문이 소개되어 있는데 참으로 다행스럽다. 

게송은 그 뜻을 새기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고 그 반대의 견해가 있으나 이는 둘 다 과불급한 주장이라고 본다. 다만 문자로 해득하고 이치로 궁구하되 필경에 있어서는 사량으로 구하지 말고 오직 관조(觀照)하는 공부라야 가능하다고 하셨다. 

묵식심통(默識心通)하는 공부가 필수다. 꼭 명심해야 한다. 하열한 근기를 위해 강연히 이르신 말씀일 뿐이다. 이르신 말씀이 방향타가 된다. 그러나 그 한 법(法)도 참 법은 아니다. 참뜻을 깨치면 천만경전을 다 볼 것이 없다고 하셨다. 극절한 부촉의 말씀에 감읍할 따름이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4월 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