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심 교무
이성심 교무

[원불교신문=이성심 교무] 기차를 타기위해 택시를 탔다. 운전대를 놓으니 5월의 도시 풍경이 읽혔다. 울타리마다 빨간 넝쿨장미가 줄지어 피어있다. “벌써 장미가 저렇게 예쁘게 피었네요”하는 필자의 말에 기사님이 응답했다. “손님은 마음의 여유가 있으시네요. 사람들은 장미를 보기는 하지만 그것이 끝입니다. 어떻게 피었는지 까지는 표현하지 않아요. 그만큼 마음의 여유와 감성 없이 살아가는데 바쁘답니다.” 대상을 보고 표현하는 것이 쉽게 되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삶에 있어 은유적 요소가 함께 할 때 생활에도 윤활유 역할을 해 준다. 그런데 그 은유는 외부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된다. 

요즘 교당 옥상 작은 화분도 개양귀비, 제라늄, 수국이 피고, 어리연도 늦었다고 부지런히 잎을 키워가고 있다. 다양한 채소들도 혼자 먹을 만큼 커 주고 있다. 조석으로 식물들을 보살피며 세상 곳곳의 꽃소식을 접한다. 하지만 내 삶의 은유를 메마르게 하는 불편한 소식도 들린다. 특히 성주성지 소성리에 사드기지공사 차량들이 들어갈 때마다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접할 때면 가슴이 아리고 시리다. 평생 삶의 터전인 주민들을 고착시키고, 기도하는 교무님을 끌어내는 경찰관계자들의 행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어야 한다. 정당한 절차 없이 진행되는 일에 왜 성직자와 주민들이 경찰의 방패에 압박과 핍박을 받아야 하는가. 세상만사가 희노애락이 어우러져 운행된다지만 고통의 세상사를 볼 때마다 중생의 부름에 응하지 못하는 것 같아 더 아프다. 소성리 주민들이 경찰의 핍박에 괴로워 하며 건져주 살려주 울며 외마디 비명을 외치는 소리는 화택(火宅) 그 자체라 느껴졌다. 영산회상이어야 할 성주성지의 평화행동에 불편함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있다. 교단 발전에 저해된다고 평가해 외면하고 회피하고 싶은 것이다. 

인생 살면서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러 할리 만무하므로 외면과 회피 보다는 대면으로 직접 불공이 문제 해결의 열쇠라 본다. 
교단 내적으로도 외면하고 회피하는 요소들이 존재한다. 중앙총부는 교화현장의 아주 작은 목소리 일지라도 외면하고 회피하면 안된다. 각종 민원이나 의견에 친절하게 응답하는 중앙총부 구성원이어야 한다. 전산종법사는 과거에는 스승님들의 기운으로 교단이 현재에 이르렀다면 교단 4대부터는 대중 기운으로 간다고 하셨다. 재가출가 교도들의 합의된 의견이라야 기운이 응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원불교가 왜 개교했나. 이 시대 사회문제나 갈등의 요소에 미미하게 응답하고 진리불공으로 그 역할을 다 하고 있다면 대중이 인증해줄까. 최근 한국갤럽조사연구소에서 한국인의 종교 현황에 대해 발표를 했다. 2021년 종교인은 40%였고, 소수점 이하는 버려져 원불교는 응답률에 올려 지지도 않았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성주성지는 교단과 국가 간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갈등의 장소다. 바라봄으로 해결될 문제가 결코 아니다. 그렇다고 해결책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외면과 회피로 평화행동 활동가와 주민들을 외롭거나 허허롭게 만들면 안된다는 것이다. 

서울대 성해영 교수는 강연에서 ‘종교의 미래’를 논하기 전에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언급했다. 내가 나를 만들어가는 시대이고, 공존의 중요성이 높아져 종교성이 아닌 영성이 부각되고 있다. 그러므로 종교는 무소의 뿔처럼 그러나 이웃과 함께, 끝없이 변화를 시도하고 독선적 태도는 버려야 한다고 강조했다.(5.13. 북카페 지관) 정답을 모르는 것도 해답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치의 당연한 갈등과 분쟁의 요소일지라도 외면, 회피보다는 은유적 요소를 가미해 공동체의 본의와 친절함으로 그 기치를 발휘해 가자.

/둔산교당

[2021년 5월 2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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