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향허 교무
문향허 교무

[원불교신문=문향허 교무] 올해도 5.18이 지나갔다. 그래도 올해는 희망의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들려온다. 처음으로 보수정당도 초청해 화해의 물꼬를 텄고, 언론에서도 긍정의 메시지를 전했다. <원불교신문>이 마련한 좌담회 ‘오월의 금남로 붉은 꽃 지던 날 광주교당 범종은 시민들의 아픔을 위로했다’는  기획과 내용 모두 적절했다. 

이번 특집은 우리 교단이 비록 교단, 교구 차원에서 조직적인 대응을 하지는 않았지만 광주교당의 목숨을 건 범종 타종과 희생영령을 위한 천도재 거행, 주먹밥 나눔 등 자체적으로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했음을 알았다. 개인적인 참여이지만 5.18항쟁을 만들어낸 전남대 총학생회의 중심에 총학생장인 고 박관현, 학원자율화추진위원장인 한상석 교도가 핵심 중 핵심으로 활동했고, 전남대 원불교학생회장이 동아리연합회장을 맡아 전남대 학생운동을 이끌었다는 점, 도청 옆에 자리한 광주교당이 거점 역할을 했고, 광주·동광주·서광주교당 교도들이 항쟁에 많이 참여했다고 밝혔다. 좌담회에 참여한 한상식, 조원식 교도는 물론 5.18묘지에 안장된 고 박관현, 임균수, 최복덕(최수복화), 김광임(김광원심) 교도의 이름이 이를 증명한다

#1. SBS 특집 ‘5.18민주화운동 40주년 그녀의 이름은’을 보다가 5.18 가두방송의 주역이었던 전옥주(춘심)님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필자가 <원불교신문> 기자로 일하던 1995년, 인터뷰  약속까지 했는데 만나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녀가 교도인데 인천 학익동에 살고 있다’는 제보를 받아 아파트까지 찾아갔건만 만나지 못했다. 당시 그녀의 목소리가 많이 아프다는 느낌이 있었는데 만나지 않은 이유를 이 방송을 보고 알게 되었다. 그 후 늘 궁금했는데 그녀가 2년 전 5.18기념식장에 나와 그 날의 방송 내용을 재현하는 영상도 볼 수 있었다. 

#2. 1980년 12월10일 광주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역인 정순철 님을 아는 이 있을까? 교단적으로는 영산사무소장이었던 김현 교무의 구속 사건으로 더 알려져 있다. <원불교신문>에는 1980년 당시로 밝혔지만 1981년에 끌려갔다.

여기에 얽힌 이야기다. 내가 정순철 님을 처음 본 것은 1981년 2월28일 경이다. 중구교당 청년회에 다니던 나는 그 날 저녁 교당에 들렀는데 분위기가 매우 심각했다. 이 분이 중구교당에 와서 양해관 교무와 피신할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피신할 곳이 마땅치 않아 고민하는 것을 보고 내가 선뜻 “우리 집으로 모시겠다”고 해 상도동 우리 집에 머물게 됐다. 그는 “당시 가톨릭농민회 소속이었지만 학생회 시절 원불교학생회에 다녔다”면서 “자기가 미문화원 방화를 했다”며 그 정당성을 이야기했다. 필자는 80년 시위에 적극 참여했어도 반미 이야기는 처음 듣는 말이어서 그와 논쟁을 했던 기억이 있다. 이 사건은 그 후 그의 바람대로 서울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으로 이어지면서 반미투쟁의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3. 한상석 교도가 좌담에서 밝혔듯 김현 교무가 정순철 은닉 혐의로 잡혀갈 당시 신발도 못 싣고 평상복 차림으로 끌려가 엄청난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 누구도 그럴 수 있냐고 나선 적이 없었다’는 지적은 뼈아프다. 당시 우리 교단의 역사의식을 엿보게 하는 장면이다. 시대정신을 보는 안목이 결여된 것은 아닐까?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이렇게 대응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 교무들의 의식이 깨어난 것이다. 

이후 그간의 방관 내지 침묵에서 벗어나 사회개벽교무단을 결성하고 영광핵폐기장 반대 투쟁을 거치면서 얻은 값진 성과이다, 몇 년 전에는 시민사회네트워크교당을 설립해 대사회활동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기반을 갖추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를 고민해야 한다.

/일산교당

[2021년 6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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