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도광 교무
박도광 교무

[원불교신문=박도광 교무] 소태산 대종사의 학문관은 그의  최초법어(最初法語) 수신(修身)의 요법에 잘 나타난다. 그는 “시대를 따라 학업에 종사하여 모든 학문을 준비할 것이요”라고 하며 종교의 도학과 더불어 과학을 비롯한 학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주종에 있어서는 “도학 공부는 모든 학술의 주인이요, 모든 공부의 근본”임을 분명히 했다. 그 이유는 마음 작용하는 공부가 일분 일각도 끊임이 없이 활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불법연구회를 창립한후 교육을 통한 인재양성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일제치하의 식민지 탄압시기에 인권의 평등을 이루기 위한 ‘타자녀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교육의 기관을 확장하고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 모든 후진을 두루 교육함으로써 세상의 문명을 촉진시키고 일체 동포가 다 같이 낙원의 생활을 할 것을 ‘타자녀 교육의 강령’으로 삼았다. 

불법연구회를 창립하면서 상조조합을 설치한 이유도 ①조합원의 공부비용에 곤란함이 없도록 함 ②학교를 설립하여 조합원의 자녀를 교육함이라고 분명히 했다. 향후, 이를 발전시켜 유아 양성소, 유아원, 학교, 양로당, 병원을 설립해 본회 유소자(幼少子)를 교양하고 노병자를 보호하고자 했다. 동선과 하선을 통한 남녀 노소 제자들 교육과 더불어 익산 총부를 중심으로 야학설립과 아동교육운동을 전개했다. 원불교는 야학을 실시하면서 그 과목으로서 조선어, 국어, 산술, 작문 등을 가르쳤으며 그 외에도 도학 및 상식을 가르치기도 했다. 일제치하 조선총독부의 교육체제하에서는 일본어를 국어로 삼아 조선어는 더 이상 가르치지 않았던 시기였다. 

야학은 조선어를 선택적으로 가르칠 수 있었으며, 원불교의 야학에서 일제 말기까지 조선어를 가르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시사해 준다. 1937년 신문에서도 70여 명에서 200여 명으로 확대하여 낮과 밤을 가리지 아니하고 통학 불능의 무산아동을 가르쳤다고 보도했다. 일제치하에서 한글을 가르치고 원불교의 경전과 회지를 모두 한글로 쓴 것은 민족의 말과 정신, 문화를 일깨우는 작업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소태산 대종사는 교단 인재양성의 전문기관의 설립을 뜻해 익산 총부에 선원과 전남 영산에 학원을 두었었다. 그러나 인재를 양성하는 구실을 다하지 못하므로 1940년에 유일학원을 익산 총부구 내에 설립하려고 노력했으나 일제의 훼방으로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가 구상한 유일학원은 정산송규에 의해 1946년 유일학림이 설립됐으며 현재 원광대학으로 발전하여 인재를 지속적으로 육성하게 됐다. 교육과 전문훈련을 통해 각자의 정신개벽이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이 나라와 세계를 건질 수 없다고 하는 소태산 대종사의 학문과 인재양성에 대한 비전이 비로소 실현되기 시작한 것이다.

/원광대학교

[2021년 8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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