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신오 교무
강신오 교무

[원불교신문=강신오 교무] 힘들게 일을 해놓고도 좋은 소리를 못들은 날. 그 서운한 말에 몸 보다 마음이 더 지치는 날이었다. 한 교무님에게 “여의보주 얻기가 왜 이렇게 힘들어요?” 하고 자조적인 물음을 던졌는데 웃으며 답을 한다. “얻기 힘드니까 여의보주지.”

요훈품 13장에서 대종사는 마음에 욕심을 떼고,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자유자재 하는 것이 바로 여의보주라고 했다.

욕심은 왜 생기는 것일까? 대종사는 ‘정신수양’에서 감정이나 감각, 의지를 갖는 사람이나 동물은 배우지 않아도 근본적으로 알아지는 것과 하고자 하는 욕심이 있다고 했고, 그 중에서도 인간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을 통해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다른 동물의 몇 배 이상이 된다고 했다.

근본적으로 알아지고 하고 싶은 것들에는 수천 년을 이어 세포에 저장된 생존과 번식에 필요한 것들이 있을 것이다. 인간의 욕심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은 보고 듣고 배우는 것을 통해 그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이 어마어마하다는 것이다. 당장 소셜미디어를 통해 멋진 곳에서 휴가를 즐기는 친구들의 소식을 보고 부러워하거나, 먼 나라의 전쟁소식에 가슴 아파한다거나,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들을 만들고 돈과 에너지를 쓰지 않는가. 

여러 가지 조건들로 인해 인간은 그 아는 것과 하고자 하는 것을 다 취할 수 없다. 문제는, 이 취하고자 하는 욕심이 천지 만엽으로 벌여 가다 보면 나중에는 예의도 없고 염치도 없고, 인도정의의 공정한 법칙은 생각할 여유도 없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힘을 다해 그 욕심을 채우려 하다가 마침내는 스스로를 망친다는 것이다.

이러한 욕심을 어떻게 떼어야 할까. ‘내가 지금 일원상인가?’ 일어난 마음을 알아차리는 그 순간이 마음에서 욕심을 뗀 순간이다. 욕심의 본래가 공한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이며,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정신, 일원상이 된 순간이다. 하지만 순간의 깨침으로 공부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나’라고 하는 아상의 생존을 위해 수 천 만생을 살아온 욕심은 그렇게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계속해서 알아차리는 부처의 습관을 유념 삼아 길들인다.

일원상 여의보주를 들어 온전해지면 하고 싶은 것과 하기 싫은 것에 끌려서 사는 삶을 벗어나 ‘선택’을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습관대로 하지 못하고, 내 마음대로 하지 못해서, 내 욕심껏 하지 못해서 괴롭다. 한 번에 되고 쉬우면 그것이 여의보주겠는가. 어려우니 여의보주라고 한 것이다. 그래서 오래오래 하라고 했다. 

마음에 일원상을 세우고 부처의 행으로 돌리다 보면 재미가 들기 시작한다. 놓치면 놓쳤구나 하고 알고, 알아차려서 일원상을 세우면 잘했구나 하고, 행까지 잘 했으면 축하하고 이렇게 일원상 여의보주 여의지 않기를 다짐한다.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9월 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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