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준영 중앙중도훈련원 교무
김준영 중앙중도훈련원 교무

[원불교신문=김준영 교무] 어릴 때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숙제가 좀처럼 해결되지 않았다. 어떻게든 살고 있지만 그 길이 최선인지는 잘 몰랐다. 그래서 늘 ‘알 수 없는 인생’의 신비가 매력적이기도 했고, 때로는 답답하기도 했다. 어떻게 해야 이 문제를 시원하게 해결하고 자신 있게 살 수 있을지 의문스러웠다. 하지만 조금씩 그 의문이 풀려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됐다. ‘내가 누구인가?’를 이해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어떻게 살아야할까?’ 그 길이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 내 마음은 어디에
나는 내 몸으로 인해 많은 것들이 규정된다. 키, 나이, 눈동자와 머리, 얼굴의 색깔에 따라 분류되기도 한다. 역할에 따라 다양하게 이름 붙여지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내 몸에 따라 가족과 친척 등 친분관계까지 정해진다. 그런데 그것만으로는 ‘나’라고 할 수가 없다. 나의 일부를 표현할 수는 있어도 나의 전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진정한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관문이 더 남아있다. 

바로 마음이다. 나는 내 몸과 마음으로 이뤄진 존재다. 몸은 다른 사람과 쉽게 구분 짓고 어떤 것이 나인지 쉽게 구별해 낼 수 있다. 문제는 마음이다.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알면 많은 의문을 풀 수 있다. 당신의 마음은 어디에 있는가. 찾아보라. 머리에 있는가. 가슴에 있는가. 손에 있나. 발에 있나?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럼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것인가. 우리의 마음은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마음의 두 측면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 쉽게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허전하다’, ‘마음이 상했다’ 등등 많은 표현을 해왔다. 하지만 정작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우리의 지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이지도 들리지도 맛을 볼 수도 없기에 우리의 마음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 이 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서는 나를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다. 

그런데 마음을 자세히 살펴보면 두 측면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바로 표층의 마음과 심층의 마음이다. 표층의 마음은 하늘에 비, 구름, 바람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내 마음 가운데 희로애락과 손익과 시비를 나누고 거기에 끌리고 흔들리는 마음이다. 반면 희생적으로 남을 도우려는 마음도 있고 동시에 일희일비하는 마음을 바라보는 마음도 있다. 마치 비구름 가득한 하늘에 배경이 되는 푸른 창공이 여여 하듯이 우리 마음 깊은 곳에도 텅 비고 고요하고 빛나는 창공과 같은 마음이 있는 것이다. 본성이라고도 하고 심층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 마음이 두 측면을 가졌음을 이해하면 우리 삶에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편안하게 바라보고 대응할 수가 있다. 아무리 표층의 마음에서 시비이해와 희로애락 등으로 흔들리고 고통스러워하더라도 심층의 마음 본성의 마음에서 보면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 연잎의 이슬임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마음을 쓸 때는 본성(심층마음)에 뿌리박은 개성(표층마음)을 발휘하며 살 필요가 있다. 아무리 본성이 같더라도 개성은 사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야 진정 행복할 수 있다
그런 측면에서 행복도 마찬가지다. 나를 알지 못하고서는 진정한 행복에 도달하기 쉽지 않다. 세상에는 행복에 대한 태도도 각양각색이다. ‘원래 행복은 없는 것이다. 행복을 추구하는 데서 불행이 있다. 그러니 아예 행복이라는 것을 꿈꾸지 말고 그냥 살라’고 조언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건강한 것과 마찬가지로 불행하지 않으면 행복한 거’라고 설득하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행복하다고 우긴다. 입으로 감사하다고 만족하다고 행복하다고 떠벌리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노력에 의해 발견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가르친다. ‘소풍 가서 보물찾기하듯 일상에서 감사할 일과 만족스러운 일을 애써 찾아내고 거기서 행복을 발견하라’고 하는 것이다. 과연 그럴까?

이 모든 행복에 대한 접근에서 빠진 게 하나 있다. 바로 행복의 주체인 나에 대한 이해다. 추상적인 행복이라는 개념이 우리의 삶으로 내려와서 행복감으로 느껴지기까지에는 주체가 있어야 한다. 바로 ‘나’라고 하는 행복의 주체에 대한 이해가 명확해야 한다. 그리고 그 나의 핵심은 나의 몸과 마음이라는 것. 어떻게 하더라도 내 마음에 대한 정확한 이해 없이는 진정한 행복에 이르기가 결코 만만하지 않다.


나는 ‘개별적인 나’이면서 동시에 세상 ‘모든 것과 하나’
어느 날 깨달았다. 내 몸은 ‘나 혼자만의 것’일 수 있어도, 나의 ‘마음은 모든 것’들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고로 ‘나는 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일 수 있다. 마치 도자기 가게에 각종 도자기들이 여러 가지 모양으로 서 있지만 그 모든 것들의 공통된 원료는 흙인 것과 같다. 

꽃병과 항아리는 흙으로 빚었지만 그 기능이 다르다. 바로 개성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각자 각자는 다른 몸, 다른 얼굴을 가진 분리된 개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모두 마음이라는 공통분모를 함께 나눠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아픈 사람을 보면 나도 아픈 것 같고, 배고픈 사람을 보면 나도 배가 고픈 것처럼 느껴진다. 왜일까? 같은 마음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도 차이는 있다. 어떤 사람은 상대의 아픔이나 마음이 훨씬 절실하게 와닿고 어떤 사람은 동떨어진 느낌을 가질 수 있다. 마음이 고요할수록, 마음이 비고 열려있을수록 공감의 느낌은 훨씬 강하다. 그래서 명상이나 수행을 오래 해 마음이 비고 열려있으면 자비심이 저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마음의 본성 그대로 발현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마음에 욕심이 가득하거나 손익에 민감하거나 무뎌져 있으면 그 마음이 잘 느껴지지 않는 것이다. 

이와같이 마음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과 공유되어 있다. 심지어 생명이 없는 것들, 보이지 않는 것들과도 공유되어 있다. 그리고 이 마음에는 과거·현재·미래와 같은 시간 구분도 없다. 물질이 아니기에 하나로 동시에 존재한다. 전체이자 하나인 것이다.


본성에 뿌리박은 한 송이 꽃처럼 개성을 발현하는 행복
이런 측면에서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이해하면 행복이라는 것을 정의하기가 훨씬 쉬워진다. 사람들은 자기 몸의 행복인 물질적 소유, 편안함, 부와 명예를 가졌을 때 행복하지만 다른 이를 행복하게 했을 때 또한 더 큰 행복감을 느낀다. 그래서 늘 ‘의미’를 묻는다. 의미있는 일, 보람된 일을 통해 행복감을 크게 느끼는 것이다. 그리고 의미있는 일, 보람된 일은 늘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

이제 조금씩 우리의 행복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우리 몸, 그러니까 개성을 가진 존재로서의 행복을 맘껏 추구할 때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동시에 우리의 마음, 그러니까 이 세상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그 마음이 행복할 때 행복을 더 크게 느낀다. 세상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그 마음이 행복하기 위해서는 의미있고 보람된, 다른 이에게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함께 행복한 데서 충만된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와 세상이 함께 조화로운 행복 
그렇게 나에 대한 인식, 행복에 대한 이해가 깊어질수록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하는 문제는 점점 명료해진다. 몸을 중심으로 하는 측면에서 개성을 가진 존재가 그 특성에 맞게 활짝 피어날 때 행복하고, 마음까지 생각해 다른 이들과 함께 행복할 때 우리는 필요충분조건의 행복을 느낄 수 있다. 지속가능한 행복이다. 그래서 결국 나의 행복과 세상의 행복을 동시에 고려하는 삶의 태도를 가질 때 우리는 비로소 양심에 찔리지 않는 지속가능한 행복을 음미하며 누리며 살 수 있다. 결국 공생의 길 만이 우리가 오랫동안 행복할 수 있는 안전한 행복이다. 

행복한 삶을 원한다면 나를 찾는 작업이 먼저다. 나의 개성을 찾아 꽃처럼 활짝 피어나게 하는 삶, 나의 본성을 찾아 세상 모두와 함께 행복하게 피어나는 삶. 거기에 지속가능한 진정한 행복이 있다. 

쉽게 이르지 못한다고 실망하지 말고 방향을 잃지 않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그리고 지금 당장 너무 행복하지 않은 것도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방향만 잃지 않으면 언젠가는 이를 수 있다.

/중앙중도훈련원

[2021년 11월 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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